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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작가의 「영화인」의 시작
영화공동체 | 06-15 | 조회수 830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 작가 · 장편영화 「침입자」 감독)


독립영화협의회를 알게 됐을 때 나는 대학 4학년, 한 학기를 남겨둔 휴학생이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막 하게 된 시점이었고, 시나리오 작가를 하려면 기본적인 영화 제작 메커니즘은 알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검색 끝에 독립영화협의회를 알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나리오 워크샵이나 전문적인 글쓰기 강좌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독립영화협의회 워크샵(이하 ‘독협’)은 내 꿈의 방향과 향후의 진로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상당히 게으른 성격이었던 내가 집에서 80분 거리의 후미진 건물에 위치한 강의실에 주 5회 오전 시간에 맞춰 출석하고 과정을 모두 마쳐 수료를 했다는 건 그 자체로도 큰 의미였다. 사실 독협에서 내가 얻은 것은 나의 작품이나 포트폴리오가 아니다. 나는 가까스로 과정을 모두 마쳐 수료를 하긴 했지만 그다지 성실한 학생은 못 되었다. 숙제는 어떻게든 열심히 제출했지만 지각 횟수가 많아서 심지어 내가 쓴 시나리오가 뽑혔음에도 불구하고 연출할 수 있는 기회는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 몇 편의 영화를 만든 이후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겠지만, 그때는 모든 게 재미있었고 영화 연출에 딱히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촬영 조수로서 작업에 임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내가 촬영에는 도통 소질이나 흥미가 없다는 것과,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재미있지만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는 것보다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훨씬 더 두근두근하다는 사실이었다.


워크샵을 시작한 것은 5월 초의 일이었는데 시작한지 며칠 되지 않아 나는 별 생각 없이 응모한 씨네21 영화평론가 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아 잡지에 글을 쓸 기회를 얻게 되었다. 워크샵을 하는 와중에도 틈틈이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하지만 남의 영화를 요약하거나 평가하는 일이, 직접 만드는 일보다 훨씬 재미없는 일이라고, 영화를 만드는 일이 자판을 두드리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오만하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아마추어들의 집합일지언정 처음 경험하는 영화 제작의 맛은 강렬했다.


사실 제작도 제작이었지만, 독협 동기들과의 술자리가 너무 재미있었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계속된 수업이 끝나고 맥주를 마시며 또 영화 얘기를 하고, 영화에 대한 꿈과 정열을 얘기하는 초짜들! 사실 영화에 별다른 관심도 없었던 나는, 한 가지 주제로 그렇게 몸과 마음을 불사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싫증을 잘 내는 내가 영화를 선택했던 건 결국 사람들과 함께 작업하는 게 즐거워서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하나하나 소중한 기억들이다.


독협에서 나는 사람을 얻었고 사람과의 작업을 얻었다. 또한 영화가 몸으로 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 계속 영화 일을 하게 되면서, 독협에서 영화를 시작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독협을 혼자 이끌어 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O희섭 선생님이 늘 강조하는 바가 있다.


“누구나 영화를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누구나는 ‘anyone’일 것이요, 아무나는 ‘everyone’일 것이다. 그들 중 몇몇, 즉 ‘someone, some people’ 만이 영화를 계속한다. 나는 O선생님이 공동작업을 강조하는 것도, 카메라(16mm 필름 카메라 박스)를 들고 5층을 오르락내리락 하는 육체훈련이나 야간산행의 일정을 넣은 것도 그 some people을 가려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결코 개인적 욕심만으로 할 수 없다는 것,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몸을 쓰는 일이라는 것. 그것이 영화 초짜들이 독협의 과정에서 얻게 되는 1차적 진리다.


우리 기수에는 한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는 특히 카메라(16mm 필름 카메라 세트)를 5층까지 짊어지고 왔다갔다 하는 것에 반발을 많이 했었다. 가까스로 수료를 하긴 했지만 언니는 워크샵 이후 더는 영화를 하지 않았다. 그 언니가 남긴 말은 참으로 단순해서 기억에 남는다.

“난 화장도 하고 구두도 신고 싶어.”

영화를 한다고 화장을 못하거나 구두를 못 신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말 안에 담긴 의미처럼 편하게는 영화를 만들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워크샵 이후에도 영화를 계속한다.


후에 자기의 작업물을 가지게 되고, 영화 학교에라도 들어가게 된다면, 즉 영화적 ‘대가리’가 커지게 되면 이 같은 독협의 방침이 상당히 고리타분하다고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워크샵 과정 중에서 그것을 견디지 못한 사람은 중간에 그만두고 만다.


하지만 나는 이 같은 다소 무식하고 거칠어 보이는 방침이 영화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유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허영심을 가지고 영화를 시작하는 것보단, 영화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고 결국 사람과 사람이 몸을 부딪혀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영화를 시작하는 이에게는 더 값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나처럼, 워크샵 내에서 자신이 쓴 시나리오를 자신이 연출할 수 없다 하더라도 말이다!


워크샵이 끝난 후에도 나는 연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몇 달 후,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을 끌어 모아 첫 연출작을 만들었다. 학창시절 내내 반장이나 임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하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계속 단편영화 현장에서 일을 하고 저예산 장편 영화의 스탭도 해 보고 영화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영화인’의 길을 걷게 된 것 같다.


불행히도 영화인의 삶은 고달프며 많은 경우 스스로는 영화인이라 칭해도 객관적으로는 백수인 경우가 많다. 마음으로는 늘 작업을 하고 있으되 학교나 현장에 속해 있지 않는 경우, 혹은 오래 몸담았던 장편 영화가 결국 불발로 끝나 크레딧을 얻지 못하는 경우 등 백수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경력은 이제 별로 부족함이 없다. 우리나라의 양대 영화학교 중 하나인 영화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졸업 영화로 몇 군데 영화제에서 상도 받았으며 그 뒤로도 장편 영화의 각색을 하거나 지원받은 영화로 꾸준히 단편 작업을 해 왔다. 장편 영화 감독 제안을 받기도 했고, 실제 장편 영화 시나리오를 가지고 회사에서 개발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처음 영화를 시작한지 13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나는 ‘입봉 감독’이 아니다. 영화를 시작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일일 것이다. 혹은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계속해서 작업을 하고 있고, 다른 인생의 중요한 기점들을 함께 누리고 있어 오히려 후회나 조급함은 없다. 몇 살에 데뷔하느냐, 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서이기도 하다.


영화를 시작하는 사람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영화는 계속해서 꿈을 꾸게 하는 강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그 꿈은 당신의 청춘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릴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영화가 아닌 자신의 삶 자체에 대해서도, 예컨대, 건강, 사랑, 가족 같은, 그 때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들에도 의식적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 술과 고뇌로 방황하고 실없는 얘기로 밤을 새는 것도 값지다. 예술은 다만 책상머리의 학업이 아니기에 그런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하지만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취미생활이나 운동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권한다. 행동하고 공부하고 경험하라. 그러면 당신의 영화는 그만큼의 당신을 반영해줄 것이다.

어떻게 영화를 시작하는지는 향후의 영화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요즘같이 핸드폰 하나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나는 독협에서 초심을 배웠다.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힘들지만, 적어도 마음속에 초심의 원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 워크샵이 30년이 되었다는 것은 한국 영화에도 큰 의미다. 그 원류를 가진 이들이 영화계에 포진해 있다는 뜻일 테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독협 워크샵이, 영화의 꿈을 가진 이들에게 담백한 초심을 전해주는 과정으로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응원한다.


□ 지난 관련 도서 “독립영화워크숍, 그 30년을 말하다 (2015년 발간)”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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