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이미지와 사운드를 골조로 하는 영화의 집, <한 채> 정범, 허장 감독
2024-11-28
글 : 송경원
사진 : 백종헌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 각각의 의미로 피어난다. 누군가에게 집은 재산 증식의 대상이고,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며,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이다. 여기, 지적장애가 있는 딸과 모텔 생활을 이어가는 남자가 있다. 아버지는 아파트 브로커에게 딸의 위장결혼 제안을 받는다. 한푼이 아쉬워 불법을 저지르는 이들의 서글픔은 약자를 착취하는 이들로 인해 더 암담해진다. 두명의 아버지와 두명의 딸에 얽힌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 채>는 그렇게 공간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한 고민으로 걸음을 뗀다.

설명만 들으면 밑바닥 불행을 늘어놓을 것 같지만 <한 채>는 이들을 섣불리 동정하거나 이해하는 대신 가만히 지켜본다. 그리하여 카메라에는 어떤 애처로움과 위태로움과 함께 단단함과 숙연함이 깃든다. 28회 부산국제영화제 LG 올레드 비전상과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한 <한 채>는 마음 편히 몸 누일 곳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사람의 자리를 기어이 발견한다. 그걸 섣불리 희망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여기 사람이 되는 시간, 가족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첫 공개 이후 1년 만에 개봉을 앞둔 <한 채>의 정범, 허장 감독을 만났다. 여전히 따뜻하고 사려 깊은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영화의 길을 고민하는 두 창작자의 이야기를 전한다.

정범, 허장(왼쪽부터).

-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첫 공개 이후 1년 만의 개봉이다. 마침 영화와 꽤 어울리는 계절에 관객을 만난다.

- 허장 시네필들이 모이는 영화제에서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인 관객들이 많았는데 일반 상영관의 관객들이 어떻게 보실지 궁금하다. 편집 과정에서 생략과 압축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만큼 관객들이 그 빈칸과 간극을 어떻게 이해해주실지 궁금하다.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면 좋겠다.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심정으로 여러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

- 정범 기쁘고 감사하고 설렌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개봉을 해서 관객들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는지 실감했다. 올해 11월은 좋은 영화들이 몰려 있어서 얼마나 오래 스크린에서 관객들을 만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럼에도 주변의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으로 관객들을 직접 만날 수 있어 하루하루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 지적장애를 지닌 딸과 아버지가 겪는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걸음을 뗐다가 아파트 분양을 위한 위장결혼이 등장하면서 예상치 못한 지점들을 건드린다.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 정범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나와 너무 가까운 이야기 말고 창작을 해보고 싶었다. 뉴스에서 빌라왕 사기 사건을 접한 뒤 위장결혼, 전입, 이혼까지 뒤따라오는 사건들을 보며 ‘우리에게 대체 집은 무엇일까’ 하는 원론적인 질문에서 출발했다.

- 허장 분명한 컨셉은 설명하지 않고 보여준다는 거였다. 문학처럼 서사에 기대지 않고 이미지와 사운드를 골조로 하는 집을 지어보고 싶었다. 서사와 이미지의 갈림길에서 늘 이미지를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가령 오프닝에서, 딸 고은(이수정)이 여관에서 빼꼼히 카운터 안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는데 원래는 여관 주인이랑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실제 여관의 주인을 출연시키고 싶었는데 섭외가 불발되어 다른 그림을 만든 거다. 지금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됐다.

- 전반적으로 상황을 만들고 꾸민다기보다 가만히 지켜보는 방식이라 인물들의 사연이 거의 설명되지 않는다.

- 정범 맞다. 상황을 만들어 재현하기보다는 인물을 공간에 데려다놓고 저절로 발생하는 것들을 포착하고 싶었다. 프레임을 먼저 잡아두고 기다리면 프레임 바깥에서 인물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식이다. 인물이 프레임 안으로 다가오는 시간 전체를 찍었다. 이후 편집을 통해 호흡이나 거리를 조정해나갔다. 로케이션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곳은 마치 우리를 위해 세팅한 것 같은 느낌을 주어 깜짝 놀라기도 했다.

- 허장 관객들이 인물들의 빈칸을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그래서 궁금하다.

- 인물만큼 공간이 중요한 영화다. 종종 공간이 진짜 주인공이라 인격을 지닌 채 인물을 가만히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 허장 구상의 순서를 굳이 따지면 공간, 시간, 인물 순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용인과 성남이 주무대였는데 그중에서도 세월의 흐름이 묻어나는 곳을 찾아다녔다. 옷 가게 같은 경우 마치 그 장소가 우리를 허락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심스럽게 출연 제안을 드려 가게를 지키던 여자 사장님이 직접 연기해주시기도 했다.

- 정범 제작 효율 차원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간들을 활용했다. 스태프들이 실제로 사는 반지하를 로케이션하기도 했고. (웃음) 공간이 정해지면 거기서 영감을 얻고 새로운 이야기가 파생되는 부분이 많았다. 편집 역시 사건상의 시간보다 공간이 우선이란 원칙이 있었다. 그 장소, 그 상황, 그 시대에 놓여 있는 인물을 카메라에 담아내는 걸 목표로 했다. 리허설을 무척 많이 했는데 그 캐릭터가 할 법한 선택들을 여러 버전으로 모두 담았다. 우리 현장에는 그래서 엔지가 없었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매 순간 다른 테이크들이 쌓여갈 뿐이다. 결과물보다는 대화와 변주의 과정 속에서 만나는 것, 발견할 수 있는 것을 찾았다.

- <한 채>라는 제목이 직관적이다. 영어 제목은 <The Berefts>다.

- 정범 ‘연흔’이라는 가제도 있었다. 파도가 남기는 물결의 흔적이라는 의미다. 문호(임후성)와 고은 부녀, 도경(이도진)과 사랑 부녀, 이렇게 두 가족이 만나서 서로에게 어떤 침식작용을 일으키고 점점 단단해지는 과정에 대한 묘사다. 의미는 좋았지만 추상적이라 좀더 직관적인 제목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이 모두 한 공간에 있다는 게 중요했기에 ‘한 채’라는 제목을 골랐다. 영어 제목은 인물들에 집중한 내용이다. 막막한 현실에 놓인 인물들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하다보니 ‘상실’(bereft)이라는 상태가 보일 것 같았다. 두 제목을 이어서 보면 느낌이 더 명확해진다.

- 허장 나는 처음에는 ‘한 채’가 와닿지 않았다. (웃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관객들을 만나고 그분들의 입을 통해 제목에 대한 해석과 의미를 거꾸로 듣다 보니 점점 애정이 생겼다. 오늘 이렇게 듣고 나니 한 채, bersft, 연흔, 세 제목이 모두 이어지는 것 같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한 채’의 집에 모인다. 그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서로의 흔적이 된다. 문호 역을 맡은 임후성 배우가 한 얘기가 있다. 문호가 마지막에 그렇게 된 건 결국 문호가 세상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거였다. 거대한 세상 속에 놓인 인간의 연약함을 포착하고 싶었다. 연약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집’이 되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 두명의 아빠와 각각의 딸들이 있다. 감독님도 두분이라 그런지 ‘둘이서 하나’로 짝이 지어진다는 것이 중요한 모티브처럼 느껴진다. 두분이 역할을 어떻게 나누었는지.

- 허장 학교 조교를 하면서 혼자 하는 다큐멘터리 진행도 버거운 상황이었는데 그때 정범 감독을 만났다. 정범 감독이 프로젝트를 하는 걸 지켜보며 함께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우리 둘은 사회적 이슈를 바라보는 결이 비슷하다. 나는 제작 경험이 있으니 정범 감독이 촬영을 겸할 수 있다면 둘이서 소규모 드림팀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우리 영화의 예산과 형편이 문호와 고은 부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적은 예산으로 모든 걸 같이 논의하며 함께 이끌어가는 게 중요했다. 한 사람이 각본, 기획, 촬영, 편집, 후반까지 모두 떠맡기에는 버거우니 그걸 나누어 진 셈이다. 간단하게는 정범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촬영하면 내가 모니터 앞에서 본다. ‘레디 액션’은 정범 감독이 외치고, ‘컷’은 내가 외치는 식이다. 나도 정범 감독도 공동연출은 처음인데 이번 경험이 무척 소중하다. 요즘 폐쇄적이지 않게 영화를 만드는 방법, 독립영화 작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부쩍 자주 한다.

- 정범 성향이 정반대라 더 좋았다. 반대인데, 같은 방향을 보는 사람이기에 여러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서로 부딪치는 지점이 소모적인 마이너스가 아니라 아이디어의 불꽃이 튀는 플러스의 현장이었다. 한쪽 눈으로 보면 넘어졌을지 모를 상황에서도 두명의 눈이라서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힘들고 서로 충돌해도 끝까지 붙들고 갔던 시간들이, 어쩌면 영화 속 두 가족처럼 함께 지내며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 같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마치 한채의 집을 지어가는 것과 닮았다.

- 쉽게 희망을 입에 담고 싶진 않지만 어둠 한가운데에서 모든 상황이 벌어지는 이 영화에는 역설적으로 어딘지 온기와 빛이 느껴진다.

- 정범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 중이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장소에 점점 가까워지는 경험이었다. 아버지와 딸이 산에 올라가는 장면이 있는데 산에 올라가는 동안의 과정을 담고 싶었다. 올라가는 동안 물도 마시고 부축하는 시간이 중요했다. 그런데 막상 정상에 올라가보니 마치 선물처럼 아파트 단지가 한눈에 보이는 정경이 눈에 들어오는 거다. 그걸 보려고 간 건 아니지만 마치 선물처럼 주어지는 순간들이 있다. 그 즉흥성을 받아들이려 했다. 공간에 인물이 들어갔을 때 일어나는 일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다. 이 영화에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런 방향성을 놓지 않고 끝까지 사람을 바라봤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허장 문예창작과 전공인 나는 글과 말로 소통한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 채>를 통해 영화언어로 소통을 시작하는 문을 연 것 같다. 내 입장에선 다른 세상이 열린 셈이다. 다만 영화는 글이나 말과 확실한 차이가 있는데, 공동작업이라는 거다. 감독 입장에서 개봉이란 뜻깊은 경험들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한순간 한순간이 모두 소중하다. 이 경험들을 조연부터 비전문 배우까지 역할의 크기에 상관없이 나누고 싶다. 그분들과 함께 지은 집이다. 함께한다는 것. 그게 ‘영화언어’가 가진 따뜻함이라고 생각한다. 한창 깨닫고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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