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혁명이란 당신과 나의 것, <되살아나는 목소리> 박수남, 박마의 감독
2024-11-28
글 : 이우빈
사진 : 최성열

박수남이라는 이름은 한명의 영화감독이자 하나의 도서관, 그리고 거대한 필름 보관소와도 같다. 수십년 동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재일조선인 원폭 피해자, 오키나와 전쟁 강제징용 피해자, 군함도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등 수없는 20세기의 국가적 비극을 찍어온 그는 이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역사의 증언자가 되었다. 박수남 감독의 딸 박마의 감독은 이 증언자의 삶을 영화로 옮기기 위해 어머니가 보관해온 10만 피트(50시간 분량)가량의 필름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소리는 되살아났다. 박수남 감독이 촬영했던 역사의 보고가 다시금 빛으로 투과되기 시작한 것이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역사의 새로운 발견이고 발광이다. 영화의 개봉을 기념해 내한한 두 감독의 숙소 앞에는 공교롭게 대규모 시위 행렬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한국이 나를 반겨주는 기분”이었다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 박수남 감독은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아직 “마음만은 20살”이라며 영화와 혁명, 기록에 대한 열의를 멈추지 않았다.

박마의, 박수남(왼쪽부터).

- 베를린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거쳐 드디어 한국에서 개봉했다.

- 박마의 어머니가 1986년에 첫 작품을 만들었는데 다섯 번째 작품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한국에서 정식으로 개봉하게 됐다. 한국의 젊은 세대가 우리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많은 청년이 영화를 보며 울었다며 어머니께 소감을 밝히더라. 감개무량하다. 어머니가 내년에 아흔이 되는 만큼 모국에서 개봉을 맞이한 의미가 더 크다.

-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의 상영 소감도 궁금하다. 한국, 일본 바깥의 사람들은 이 작품을 어떻게 보던가.

- 박마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한 스위스 사람이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본 뒤 어머니를 꼭 인터뷰하고 싶다며 찾아온 적이 있다. 알고 보니 그분의 어머니는 오키나와,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본인 어머니의 역사를 알기 위해 평소에 어머니(박수남 감독)의 영화를 봐왔다더라. 대화를 나눈 뒤엔 어머니를 이렇게 인터뷰하는 게 정말 영광이란 말을 전했다. 그러곤 다음 작품으로 오키나와의 역사와 전쟁 피해자에 대한 영화를 꼭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반대로 우리 어머니(박수남 감독)께선 당신의 어머니를 꼭 인터뷰하고 싶다고 말씀하셨고. (웃음) 역사란 끝나는 일이 아닌 셈이다.

-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원폭 피해자, 위안부 피해자, 강제 징용공, 오키나와 학살 등 여러 주제를 담고 있다. 주제를 엮어가는 순서나 방식은 어떻게 정했나.

- 박마의 아직도 25%밖에 복원하지 못한 10만 피트의 필름을 하나하나 복원해가며 영화를 구성했다. 우선 14살 때 군함도에 징용공으로 끌려가 원폭 피해까지 입은 서정우씨의 영상을 복원하려 했다. 원래 어머니께서는 서정우씨의 증언을 기반으로 <또 하나의 나가사키>라는 제목의 작품을 기획했었기에 이번 작품을 시작하면서도 가장 먼저 주목했다. 그다음으론 1990년대에 기록한 원폭 피해자들의 영상을 복원했고, 그렇게 차차 영화의 구성을 잡아나갔다.

- 영화의 실제 초반부에서 중반부까지 고마쓰가와 살인사건, 이진우씨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큰 차별을 받았던 인물의 일대기다.

- 박수남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는 부모님들의 엄청난 고생을 보며 자랐고, 민족에 대한 큰 차별을 겪으며 살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 역시 이러한 차별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고마쓰가와 사건부터 시작하는 방식이 관객들의 이해를 가장 쉽게 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 사회에서 버림받고, 심지어 조국에서도 버림받은 동포들. 일본의 침략으로 가장 큰 탄압을 받은 피해자가 이진우씨였다.

- 재일교포들의 차별을 꾸준히 기록해온 경위는.

- 박수남 일본의 재일교포들은 아직 해방을 맞이하지 못했다. 여전히 왜정 시절과 같이 탄압받으며 살고 있다. 죽을 지경으로 고생하며 산 동포들의 이야기가 한국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많다. 김치도 고추장도 매워서 못 먹는 우리에겐 늘 ‘반(半)일본인’이란 꼬리표가 달렸다.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일본 사회에서 겪는 우리의 문제를 우리 겨레, 한국인들이 알아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주길 바라며 기록영화를 찍었다.

- 영화에서 고마쓰가와 사건에 대해 오시마 나기사의 <교사형> 같은 픽션 만들기의 방식은 일부러 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극영화 등이 아닌 다큐멘터리 형태를 택해야 했던 이유는.

- 박수남 이 복잡한 사건의 맥락을 파악하려면 하나의 영화로는 부족하다. 긴 호흡의 기록영화 형태가 필요하고, 그래서 이 주제 하나만 다루는 작품을 다시 만들고 싶은 마음이 크다.

- 박마의 고마쓰가와 사건의 관계자는 지금 거의 다 돌아가신 상태다. 10년 전만 해도 이진우씨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선생님 등이 살아 계셨는데 이제는 안 계신다. 이진우씨와 직접 교류한 건 이제 사실상 어머니가 유일하다. 내 어머니이긴 하지만 일본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건 그 한복판에 있던 마지막 증언자이시기도 하다. 어머니가 투옥 중의 이진우씨와 주고받은 편지로 엮은 <죄와 죽음과 사랑과>(1963)가 있긴 하다. 다만 이 내용을 영화 하나로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이 사건만 따로 하나의 다큐멘터리나 다큐멘터리 속의 픽션, 아니면 낭독영화 등의 다양한 형태로 만들고자 하는 계획이 있다.

- <되살아나는 목소리> 중에 “어머니의 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라는 박마의 감독님의 내레이션이 있다. 영화를 작업하며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나 어머니에 대해 새롭게 느낀 감정이 있다면.

- 박마의 말 그대로 어디 장례식 같은 곳에서 말고는 어머니가 우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영화엔 편집했지만, 촬영 현장에서 어머니가 계속 감정에 벅차 우시는 장면이 필름에 많이 기록돼 있었다. 원폭 피해자인 대구의 김분순 할머니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어머니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감독이 인터뷰이와 이렇게까지 같이 울고 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네 번째 영화까지 어머니가 직접 등장한 장면은 거의 없었다. 몇백 시간짜리 영상을 봐왔는데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되살아나는 목소리>를 위해 필름을 복원하면서 비로소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 거다.

- 박수남 감독님께선 일부러 자신의 모습을 화면에서 지운 것인가.

- 박마의 맞다. 인터뷰하다가 잠시만 프레임 안에 본인의 모습이 들어오더라도 편집자에게 다 빼라고 하셨다더라. 하지만 <되살아나는 목소리>엔 어머니가 감독이자 한명의 증언자로 등장하는 것이므로 꼭 어머니가 나와야 했다. 설득 과정이 쉽진 않았다. (웃음) 본인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말씀하시더라. 이건 곧 나도 영화에 증언자로서 등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우리 둘 다 꼭 나와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며 작업했다.

- 박수남 감독님께서 평소 가장 많이 쓰는 단어는 기록영화, 그리고 혁명영화다. 혁명영화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 박수남 이번에 한국에 왔는데 시청 앞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더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내 영화가 지금 혁명으로 불타는 서울에서 환영받는다고 생각했다. 항상 한국의 혁명을 바라고 있지만 지금의 한국 사회는 점점 혁명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그 시청 앞의 벅찬 고함을 듣고 나니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지만 아직 멀었다. 우리가 온돌방 안에 앉아 혁명이나 남북통일 같은 대사를 기다려봐야 소용없다. 각자의 혁명을 위해서는 오지도 않을 장군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일어나서 나가야 한다. 한국은 4·19 혁명도 이뤄낸 곳이지 않나. 물론 그때 난 20살도 안된 아이였고 지금은 다 늙었지만, 마음만은 지금 20살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의 피도 아직 뜨겁다.

- 기록영화, 혁명영화를 끝없이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 박마의 어머니가 말하는 혁명은 사실 내 세대가 직접 실감할 수 없는 쪽에 가깝다. 나 역시 뉴스나 책으로만 접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작품 활동을 보면서 느낀 바는 있다. 어머니의 영화는 대개 공동체 상영으로 상영됐고, 어머니는 필름을 직접 손에 쥐고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화를 틀고 강연했다. 그리고 그 상영회를 본 관객들은 본인들이 직접 상영 기획자가 돼 또 이곳저곳에서 어머니의 영화를 틀었다. 그들의 목표는 원폭 피해자들,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청을 일본 정부에 제대로 전달하고 맞서는 일이었다. 이런 과정을 목격하며, 그 뭐지 표현이 안 떠오르는데….

- 박수남 촛불 하나로 모든 게 시작된다.

- 박마의 맞다. 촛불 하나, 성냥 하나의 불빛부터 혁명이 시작된다고 어머니가 늘 상영회에서 말씀하신다. 2013년 홋카이도의 어느 폐교에서 열렸던 ‘공상의 숲 영화제’에서 <누치가후-옥쇄장으로부터의 증언>을 틀었을 때의 기억이 무척 생생하다. 산 깊숙이까지 온 관객들이 영화를 본 뒤 어머니와 밤새 술 마시며 이야기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눴다. 그걸 보면서 ‘그렇구나, 혁명은 이렇게 사람을 만나는 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구나’라고 느끼곤 했다. 그래서 나 역시 상영회에 오신 일본인이나 재일조선인들의 감상 소감을 하나하나 모두 모으고 있다. 우리 세대와 이전 세대, 한국과 일본과 재일교포 모두가 우리 영화를 통해 각자의 생각을 털어놓고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지금이야말로 다양한 대화가 필요한 때고, 그런 자리가 늘어나는 것이 내 소망이다. 이게 내가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이다.

- 박수남 수십년간 영화를 만들며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징용공으로 생지옥을 경험하고, 독립운동 중에 목숨을 바친 열사들의 투쟁을, 그 한과 위대함을 아직 가슴에 새기고 있다. 그 당시 고통받았던 우리 겨레의 아픔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 한을 누가 풀 수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신과 나밖에 없다”라고 늘 말하고 다닌다.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이루기까지 영화를 만들 것이다. 기록영화를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은 이것이다. 내 영화를 통해 한명의 열사를 만드는 일. 한국에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니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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