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아수라처럼, 진짜 아수라는 아닌’, 설 연휴 추천 OTT <아수라처럼>
2025-01-24
글 : 김세인 (영화감독.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연출)

끓어오르는 네명의 여자가 있다. 준비 태세를 갖추더니 곧이어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옴과 동시에 손에 든 망개나뭇가지, 털실, 립스틱, 권투 글러브를 카메라 너머로 힘껏 날리며 포효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연출의 드라마 <아수라처럼>의 오프닝을 처음 본 이후 매일 수없이 영상을 돌려보았다. 진창 난 내면을 배회하다 이윽고 촉발되고 끝내 화르르 불타버리는 그런 여자들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짐승과도 같은 그녀들의 울음소리에 응답할 준비를 하며 며칠을 보냈다. 1월9일 목요일 <아수라처럼>이 오픈되고 그주 주말에 뒤늦은 시청을 하였는데, 결론은 나는 그녀들의 포효에 응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네 자매가 정말로는 포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프닝의 장면들은 실상 본편에서는 없는 장면들이었다.

간략한 줄거리는 이러하다. 도서관에 근무하는 삼녀 타키코는 도서관이 오픈되기도 전인 이른 시간에 출근해 차녀 마키코에게 전화를 건다. 할 얘기가 있다며 자매들을 소집하는 타키코. 그녀는 성에 낀 유리에 ‘아버지’라는 단서를 남긴다. 타키코에 의해 마키코, 장녀 츠나코, 사녀 사키코는 아버지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커다란 복숭아가 둥실둥실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하는 옛날이야기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처럼 한적하고 평화로운 노년 생활을 보내고만 있는 줄 알았던 부모의 모습은 가면극에 불과했다. 아버지의 불륜을 두고 각자의 입장이 다른 타케자와 네 자매들은 밝혀지는 또 다른 불륜 사건과 사고들을 시기, 질투에 휩싸인 채로 통과해나간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면과 징후

이 드라마는 견고한 가면을 벗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번 비춘다. 첫 번째, 아버지의 코트에 먼지를 털다가 자동차 장난감을 발견하였을 때이다. 어머니는 장난감을 미닫이에 집어던지는데, 그녀는 남편의 불륜 사실보다는 불륜 증거를 집에 들인 아버지의 치밀하지 못함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노래를 이어 부르며 분노를 진화한다. 곧이어 사키코의 전화벨이 울리자 그녀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다시 가면을 쓴다. 미닫이의 구멍도 벚꽃 모양 색종이로 감추어진다. 두 번째, 내연녀의 아파트 앞에서이다. 홀로 내연녀의 집을 찾은 어머니는 무방비의 상태로 고독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는데, 마키코에 의해 발각된다. 마치 벌거숭이의 모습을 보인 것처럼 어쩔 줄 모르는 그녀는 다시 가면을 쓰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견고했던 어머니는 더이상 옛날이야기 속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연극할 수 없음에 제 역할을 다한 듯 죽음으로써 소진된다. 이렇게 돌연 가족극에서 스르르 미끄러지는 어머니가 어떻게 황폐해지다가 끝내 닳아서 소멸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은 정작 어머니 스스로에게서가 아닌 그녀의 공석 이후 차녀 마키코에게 나타나게 된다.

가족이라는 연극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남편의 불륜을 감내하고 있는 마키코는 “인정하면 여자는 지는 거야”라는 어머니의 자세를 전승받아 태연히 자신의 가정에 불륜이 존재하지 않는 척 연기한다. 뜨개질과 언니의 남편 찾기에 몰두해보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마트에서 과일 통조림을 도둑질하는 이상행동을 반복한다. 마키코의 딸 사토미는 아빠의 불륜을 눈치채고 마키코 대신 감시자 역할을 자처하는데, 어느 순간 사토미에게도 물건을 도둑질하는 이상행동이 발현되고야 만다. 책방 주인에게 사과하고 돌아오는 길에 사토미는 마키코에게, 본인에게 뭐든지 털어놓으라고 하지만 끝내 마키코는 사토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따뜻한 음악이 흐르는 이 장면에서 나는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한 말끔하지 않은 기분은 타키코와 사키코의 장면에서도 이어졌다. 병문안을 온 타키코와 시즈오에게 사키코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속내를 더듬더듬 힘겹게 털어놓는다. 그런 사키코에게 다가온 타키코는 “더 말 안 해도 돼”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타키코는 사키코의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나는 이러한 일련의 연속된 장면에서 애틋한 자매애에 마음이 녹기보다는 더 얼어붙고야 말았다. 나는 타키코의 말이 무척이나 냉정하고 이성적인 명령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입을 다물 것, 속내를 숨길 것, 가면을 쓸 것, 맨얼굴을 드러내지 말 것. 타키코가 나서며 역설적으로 사키코의 심정은 그녀의 입을 통해 직접 발화되지 못하고 또다시 삼켜지고야 마는 것이다. 타케자와 네 자매가 그들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가면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각자의 얼굴에 더욱 질기게 흡착된다. 드라마 속 타케자와 가족들은 대체로 웃고 떠들고 명랑하지만 그와 함께 시리도록 서늘한 기운이 동반된다.

두번의 연극 장면이 나온다. 첫 번째는 타케자와 식구들의 분라쿠 단체 관람 장면이다. 타케자와 식구들은 분라쿠 관람 이후 돌아온 집에서 다같이 초밥을 먹는다. 마키코는 가장 비싼 초밥, 타키코는 문어와 오징어, 어머니는 계란과 장어 등 정해진 각자의 초밥을 먹는다. 마치 분라쿠의 인형들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듯이 말이다. 두 번째는 츠나코의 선 자리이다. 츠나코와 상대 남성, 마키코는 가면극을 보러 간다. 가면극을 보는 츠나코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이내 극장을 뛰쳐나간다. 츠나코의 이러한 행동은 타케자와가 이외에는 가족이라는 연극판에 포섭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느껴진다. 이렇게 연출은 다소 직접적으로 가족과 연극을 병치시키고 있다. 마키코는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방문 이후 이러한 가족 연극을 그만두려 한다. 남편 타카오에게 불륜 상대의 이름을 물어보지만 타카오는 이 연극을 끝낼 의사가 없다. 계속되는 추궁 속에 타카오는 속이 타는지 물을 한컵 떠 마시려는데 뒤따라온 마키코가 눈을 부릅 뜬 상태로 타카오의 물을 뺏어 들이켠다. 애타는 속, 그 갈증은 이제 마키코의 것이 아니다. 타카오 자신의 것이다. 마키코 입에선 속이 시원한 듯 짧은 탄식이 흘러나오지만, 역시나 나에게는 또다시 마뜩잖게 느껴졌다. 이 부부가 진실한 대화 대신 또 다른 가면을 바꿔 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마치 마키코는 감시자로서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고, 타카오는 마키코의 눈치를 보는 척, 그녀를 무서워하는 척하지만 불륜을 이어갈 것이고 마키코의 얼굴은 곪아갈 것 같다는 예상이 들었다. 연극은 끝나지 않았다. <아수라처럼>의 곪아가는 여자들은 시시한 물총, 손가락 총을 들거나 가면을 절대 사수한다. 나는 보다 과격하고도 괴팍하게 그녀들이 가면을 찢고 나오기를, 진짜 아수라들이 크게 포효하기를 기다렸기에 7화까지의 시청을 마치고 혀 안에 맴도는 떫은맛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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