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읽기]
<반지의 제왕: 두개의 탑>을 보고 한국 판타지영화를 생각하다
2003-01-16
국산 판타지,백그라운드가 약하다

<코난 더 바바리안> <레전드> <윌로우> <레이디 호크> <드래곤하트> <라비린쓰> <하이랜더>의 공통점은? 첫 번째 공통점은 할리우드 유명 배우가 출연했다는 겁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톰 크루즈, 발 킬머, 룻거 하우어, 미셸 파이퍼, 숀 코너리, 제니퍼 코너리, 크리스토퍼 램버트 등이 출연했습니다. 물론 할리우드가 자랑하는 전가의 보도인 스타 시스템을 입증하기 위해 저 리스트를 두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잠시 말을 바꿔서, 우리는 영화가 영화이기에 보는 시대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당신이 움직이는 그림의 신비에 넋이 나가는 19 세기에서 온 시간 여행자라면, 그냥 조용히 자기 시대로 돌아가주기 바랍니다). 영화가 범람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한정된 영화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취향과 애호, 기준을 가지고 있지요. 어떤 이들은 감독을, 어떤 이들은 배우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장르를 기준으로 삼는 관객도 있습니다. 타자는 세 번째 부류에 속합니다. 판타지 애호가인 타자는 판타지영화를 즐깁니다. 저 영화들의 두 번째 공통점은 모두 판타지영화라는 것입니다.

사이파이, 이제 한국도 반긴다?

지난해에 개봉된 <반지의 제왕> FotR에 이어 올해 <반지의 제왕> TTT가 개봉되었습니다. 영화감상을 끝낸 뒤, 온갖 감정 속에서 타자는 십여년 전 사이파이 애호가들이 중얼거리던 탄식을 곱씹어보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이파이영화는 안 돼.”

성장이 우선이었고 민주화가 급선무였던 그 시절, 현실의 핍진함 때문에 비현실을 찾아다닐 처지가 되지 못했던 한국의 관객은 사이파이를 별로 반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한국인들도 여유를 가지고 삶의 질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사이파이영화들의 사정도 좀 나아졌지요. <에일리언> <스타워즈> <터미네이터> <매트릭스> <맨 인 블랙> 등의 사이파이영화들은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판타지가 겪어온 상황도 비슷합니다. 서두에서 두드린 리스트는 초특급 스타들이 출연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별로 호응 받지 못한 판타지영화들입니다. 단순히 무시되는 정도를 넘어서 판타지는 때로 사이파이의 한 아류로 받아들여지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판타지의 사정도 나아졌습니다. <반지의 제왕> TTT와 <해리 포터> CoS라는 판타지영화 두편이 겨울 극장가를 놓고 경쟁하는, 십여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참 놀랍기까지 합니다.

한국의 관객은 이제 사이파이나 판타지 같은 장르의 코드들을 받아들인 것일까요?

누구나 알 듯 영화는 영화입니다. 관객은 다른 사람(극작가, 감독, 배우)들이 삶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구경하고 싶어하는 것이지 삶을 인식하는 자신의 방식을 변화시키기 위해 극장을 찾지는 않습니다. 타자 또한 TTT를 감상한 분들에게 환상을 통해 삶의 내밀한 의미를 더듬어보는 판타지의 방식을 익히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분들이 보셨으니 그중 판타지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도 계실 겁니다. TTT는 그런 분께 좋은 영화입니다. 판타지의 바이블이라고까지 불리는 불후의 명작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훌륭한 판타지영화니까요.

바로 그게 문제입니다. 당분간은 그 이상으로 훌륭한 원작은 없을 것 같습니다. 영화화된 <스파이더 맨>을 보면서 이젠 헐크밖에 안 남았나 걱정하는 슈퍼 히어로 애호가들처럼, <반지의 제왕>이 제작되었으니 이제 뭐가 남았나 염려해보는 셈이지요.

한국 판타지, <은행나무 침대> 이후가 없다

그 시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국산 판타지영화입니다. 좋은 국산 판타지영화들이 많이 제작된다면 타자 같은 작자는 크게 즐거워할 일이겠지요. 하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은행나무 침대> 이후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국산 판타지영화가 별로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제작이 너무 힘들어서 물론 판타지영화 제작에 특수촬영이 필요한 경우가 많기는 합니다. 하지만 <식스 센스>나 <비밀>처럼 간단한 방법으로도 판타지의 코드를 잘 살려내는 영화도 있고 <화산고>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처럼 막대한 특수촬영을 해놓고도 실패하는 영화도 있지요. 특수촬영은 문제의 핵심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판타지영화를 판타지답게 만드는 걸까요.

<화산고>와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의 극작가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이 영화들에는 배후 세계관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별로 안 보입니다. 판타지는 환상이라는 의미지만 그 고유한 환상성은 자신의 배후 세계에 대해 ‘아무런 환상이나 도약없이’ 충실했을 때 얻어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TTT로 돌아올까요. 타자는 TTT에 있는 장점들 중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환상적인 영상이나 장엄한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 완벽한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배후세계가 얼마나 거대한지 잠깐 볼까요.

‘먼 옛날, 일루바타르라 불리는 유일한 자, 에루가 있었다. 에루는 그의 생각으로 아이누라는 종족을 만들었다. 아이누들은 에루 앞에서 위대한 음악을 연주했으며 일루바타르는 그들의 음악을 가시화시켰다. 아이누들이 본 것은 일루바타르의 자손인 엘프와 인간들이 살아갈 세계였다. 아이누들은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세계를 건설하길 원했다. 세계를 건설한 아이누들은 세계의 힘이라는 의미의 발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들 중 멜코르라 불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오만했으며 처음에는 에루에 저항했고 세계의 아름다움을 본 뒤에는 그곳의 왕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에루의 계획에 그런 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멜코르는 실의에 빠졌고 세계의 창조에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그의 악의와 변덕 때문에 그 형체는 어둡고 무서워 보였다. 그래서 엘프들은 멜코르라는 이름 대신 세상의 적이라는 뜻의 모르고스라는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한편 발라들과 함께 세계에 내려온 또 다른 존재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마이아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발라와 같은 계열이었지만 신분은 아래였다. 마이아들은 발라들에게 봉사했는데, 그들 중 일부는 잘못된 봉사를 하기도 했다. 멜코르에게 봉사한 마이아들이 바로 잘못된 길을 걸었던 마이아들이다. 그들 중에는 강대한 사우론과 불의 회초리를 휘두르는 공포의 악마 발록 등이 있었다. 멜코르와 이들 강력한 조력자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발라들은 세계를 건설했다. 하지만 일루바타르의 자손이 깨어나려면 아직 멀었고 멜코르의 횡포는 나날이 더해갔다. 그래서 아울레라는 발라는 성급하게 난쟁이들을 만들었다. 일루바타르는 그 창조를 용인했지만 엘프와 인간의 선행 종족을 원하지 않았기에 난쟁이들은 다른 자들이 태어날 때까지 돌 속에 잠들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엘프와 인간이 태어났다. 엘프는 위대하고 불사신이며 발라들을 닮았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와 죽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바로 그런 이유에서 멜코르를 더 닮아 있었다. 그러나 일루바타르의 계획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 결국 세계는 인간들을 위해 준비된 것이며, 때가 되면 엘프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 일루바타르의 다른 계획에 포함될 것이다. 한편 멜코르는 엘프를 비웃기 위해 오크라는 혐오스러운 존재를 만들어내었다.’

이 낯선 이름들 중 사우론이나 발록의 이름은 TTT를 본 분들에게 익숙할 것입니다. 영화 소개에서 사우론은 악의 제왕이라는 식으로 표현되지만, 사실은 제왕의 종복에 불과했던 자입니다. 한편 우리의 스타 간달프는 사실은 마이아이며, 신분으로 따지면 사우론과 맞먹는 위대한 자입니다. 물론 합리적인 이유에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만.

치밀한 배후가 필요해

이렇게 창조된 세계는 장구한 역사를 거치게 됩니다. 발라들에 기원한 선과 멜코르에 기원한 악은 오랜 세월 투쟁해왔습니다. <반지의 제왕>의 모든 이야기는 이 장대한 투쟁사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세계를 떠날 운명인 엘프들이 마지막으로 인간들과 힘을 합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악의 세력 사우론과 그의 반지에 대항하여 싸우는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지 않습니다.

치밀한 배후세계. 그것이 판타지를 판타지답게 만들어주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환상일 수밖에 없는 ‘Fantasy’가 소통에 필요한 ‘Reality’를 얻어 ‘Art’가 되는 열쇠입니다. 판타지를 만들기 위해 어떤 환상적인 가정을 사용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그 환상적인 가정을 통해 얻은 세계관은 시시콜콜할 정도로 따지고 지켜야 합니다. 좋은 국산 판타지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특수촬영에 바치는 노고보다 몇배 더 많은 노고를 세계관 구성에 바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쪽에서 게으름을 좀 부리는 것 같습니다.

장황해진 바가 적지 않습니다. 결국 타자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TTT를 보신 영화 제작자님들. 그 충격적인 영상에 현혹되지 말고 자기가 설정한 세계관을 충실히 지키는 모습을 보아주십시오. 그리고 좋은 판타지영화 좀 만들어서 저를 즐겁게 해주세요. 예?”타자 이영도/ 판타지 소설가 <드래곤 라자>

* 필자주타자: 저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사람입니다. 붓을 쥐는 필자가 아닙니다.(사이파이: Sci-Fi, SF, Science Fiction, 과학소설(공상과학소설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