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통신원]
[LA] LA에서 만나는 대안영화
2003-09-22
글 : 옥혜령 (LA 통신원)
크리스 마커 회고전 열려, 60년대 대표 다큐멘터리부터 최신작까지

할리우드의 그늘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도시 LA가 미국 대안영화의 역사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1950, 60년대 LA에서 미국의 아방가르드가 시작되었고 도시 곳곳에 위치한 예술전용관에서 유럽영화와 언더그라운드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가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기수가 되었지만, 대안문화의 쇠퇴와 함께 LA의 이러한 역사는 곧 믿기 어려운 전설이 되고 말았다. 이제 LA에서 할리우드 이외의 영화를 보는 것은 다른 도시에서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LA에 몇 남지 않은 예술전용관 가운데 하나인 아메리칸 시네마테크에서 지난 9월5일부터 7일까지 프랑스 감독 크리스 마커의 회고전(Remembrance of Things to Come: New and Classic Work from Chris Marker)이 열렸다. 단기간이었지만 매회 열띤 호응을 얻었던 이번 행사는 초창기 단편 <조각들도 죽는다>(1953), <라 지떼>(1962)에서 최신작 <다가오는 것들의 기억>(2001)에 이르기까지 말로만 듣던 크리스 마커의 영화 일곱편이 처음으로 로스앤젤리노들에게 공식 소개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흔히 테리 길리엄 감독의 의 원작이자 걸작 SF단편영화라 칭송받는 <라 지떼>로 알려져 있는 크리스 마커는 1950, 60년대 앙드레 바쟁, 알랭 레네 등과 함께 작업한 연유로 흔히 프랑스 누벨바그와 연관되어지지만, 사실 그의 행보는 이들과 조금 달랐다. 당시 할리우드를 제1의 영화, 유럽의 뉴웨이브영화들을 제2의 영화로 지목하면서 이들 영화의 탈정치적, 개인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고, 정치적인 매체로서의 ‘제3의 영화’를 제창한 남미의 영화인들이 유럽의 감독 중 유일하게 크리스 마커를 동지로 지적한 점에서 그의 남다름을 읽을 수 있다. 노동자들과 함께 작업하며 이른바 ‘게릴라영화’를 시도하는 등 크리스 마커는 제작방식과 내용에서 정치성이 강한 다큐멘터리를 주로 제작해왔다. 그러나 ‘영화-에세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크리스 마커의 다큐멘터리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달리 역사나 사건의 기록이라기보다 지적이고 때로는 시적인 재구성을 통해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이번 회고전은 특별히 60년대 혁명운동을 회고하는 <허탈한 웃음>(1977)이나 <상 솔레이유>(1982) 같은 그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들뿐 아니라 최근 멀티미디어로 관심을 확장한 감독의 최신작, <다가오는 것들의 기억>과 <안드레이 아세네비치의 어떤 하루>(2000) 등을 접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크리스 마커는 누벨바그 세대의 또 다른 감독인 아녜스 바르다와 함께 남가주대학의 멀티미디어 프로젝트에 초청되어 얼마 뒤 LA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50년 동안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넓혀가는 노감독들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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