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인 가족드라마,<굿바이 레닌>
2003-10-21
글 : 이성욱 (<팝툰> 편집장)
■ Story

동독에서 사회주의 이상 실현을 위해 헌신하던 크리스티아네는 소박한 반체제 시위로 경찰에 붙잡혀가는 아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쓰러진 뒤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뒤 8개월이 흐르는 사이 세상은 급변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동독은 서독에 흡수되는 중이다. 크리스티아네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심장이 극도로 약해진 터라 미약한 충격도 피해야 할 상황. 아들 알렉스는 어머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스러져가는 동독을 찬란하게 꽃피는 나라로 위장하는 거짓 상황을 연출하게 된다.

■ Review

때는 1978년 동독, 아늑한 전원 별장에서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다. 이를 좇는 카메라는 부모의 시선이고, 그 위로 깔리는 내레이션은 성장한 아들 알렉스의 목소리다. “지그문트 얀이 첫 동독인 우주비행사로 소유스 31호에 탑승했던 그해에 우리 가족의 수난사가 시작됐다.” 단란한 가족의 한순간을 홈비디오처럼 틀어주는 첫 장면은, 자본주의보다 한걸음 앞서 나아갔던 사회주의 우주개척의 역사적 현장을 담은 뉴스릴로 이어진다. 행복으로 가득한 순간 알렉스의 가족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처럼 장밋빛이었던 인류의 체제 실험은 그때부터 초라하게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굿바이, 레닌!>은 비극적이면서 희극적인 가족드라마를 사라져가는 유토피아에 대한 소묘(혹은 소망)와 겹쳐놓은 ‘웰메이드’ 상업영화다. 지뢰밭에서 시작된 희극을 시대적 비극으로 풀어간 <공동경비구역 JSA>처럼, 엽기적 범죄를 코믹과 스릴, 휴머니티로 배합한 <살인의 추억>처럼, <굿바이, 레닌!>은 겹겹의 층으로 쌓은 정교한 드라마로 625만명의 독일 관객을 사로잡았다. 역대 자국영화 흥행 2위라는 위업은 독일 안에서 동쪽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의 ‘노스탤지어’(Nostalgia)가 결합된 ‘오스탤지어’(Ostalgia)란 신조어를 낳았고, 시장에서 퇴출됐던 동독산 오이피클과 초콜릿의 부활을 거쳐 비웃음거리였던 동독산 트라반 승용차의 전시회로 이어졌다.

수난이 시작된 건 서독으로 출장갔던 아버지가 “자본주의 여자에게 빠져 다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끄트머리에 밝혀지지만 이 주장은 틀리기도 하고 옳기도 하다. 어쨌든 알렉스의 어머니는 스스로 살아가는 동력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가열찬 사회주의 일꾼이 된다. 살벌한 체제 수호자가 아니라 따뜻한 이타주의로 무장한 사회주의 모범 인간으로 살아가던 어머니에게 알렉스의 시위 행각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가 잠시 정신을 놓아버린 몇 개월 동안 동독 사회통일당 당수 호네커는 사임하고 베를린 장벽은 철거된다. 알렉스가 이런 정치적 격변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자신 때문에 위기에 처한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사회주의는 계속 지속돼야 하고, 동독은 서독을 이겨야 한다.

8개월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엄마 크리스티아네,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세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말에 아들 알렉스는 계략을 꾸민다. '엄마 녹이기'를 위해서 주위의 이웃과 친척들은 모두 연극배우가 된다.

알렉스의 불가능한 임무를 돕는 건 결혼식 비디오 편집으로 를 패러디했다며 어이없는 자부심을 느끼는 ‘시네아스트’ 친구다. 이들은 꼼짝없이 방에 누워 있는 어머니에게 조작된 뉴스를 제공한다. 옛 뉴스를 보며 “진보는 계속되는데 난 쓸모가 없구나”라고 자조하는 어머니에게 동독으로 밀려드는 록카페, 포르노, 코카콜라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알렉스는 콜라가 실은 50년대 동독에서 발명한 것으로, 바뀌는 거리 풍경은 신나치당이 장악한 서독을 탈출해 동독으로 밀려드는 자본주의 난민 때문인 것으로 기막히게 포장해낸다. 어머니의 방이 신기루의 오아시스로 변모하는 사이 그가 40년 동안 애지중지 모은 돈은 화폐교환의 시기를 놓쳐 휴짓조각이 되고, 알렉스의 누이는 서독 출신 놈팡이와 살림을 차린다. 알렉스의 애인이 된 러시아 교환학생 라라는 “원래 진실이란 모호해서 각색하기도 쉽다”는 걸 인정하지만 이 소동극이 소름 끼친다며 그만둘 것을 권고한다. 왜 아니겠는가? 알렉스의 누이는 10여년 만에 자신의 직장에 손님으로 찾아온 아버지를 발견하지만 새 가장이 된 그에게 “버거킹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이 블랙코미디는 끔찍하긴커녕 부드럽고 촉촉하다. <굿바이, 레닌!>이 동·서독 합작품이기도 한 폴커 슐뢴도르프의 <레전드 오브 리타>와 닮았으되 다른 매력이다. 인간의 이상이 어떻게 현실의 정치와 체제에서 사그라드는지 지켜보긴 마찬가지이지만 차가운 이성을 따뜻한 감성으로 감싸 선입견을 무장해제시키는 대중성 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아들에게 희망으로 바꿔주던 아버지의 천연덕스런 거짓말이 그랬던 것처럼. 열정으로 가득 찼던 어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슬며시 잠겨들 즈음, 동독 최초의 우주비행사 얀을 어릴 적 우상으로 삼았던 알렉스다운 끝맺음이 질문 하나를 던진다. 정녕 그것은 우주로 나아가야 가능할 꿈인가.

혹독했고,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볼프강 베커(49) 감독은 서독에서 태어나 베를린자유대학에서 독미문학을 전공한 뒤 ‘독일영화TV아카데미’에서 연출을 공부했다. 졸업작품 <나비>로 할리우드의 스튜던트 필름 어워드와 로카르노영화제 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자못 화려하게 출발한 그는 1997년 영화사 ‘X filme’를 만들어 <인생은 너의 모든 것>(Life Is All You Get)으로 흥행에 성공한다. 그뒤 5년 만에 만든 영화가 <굿바이, 레닌!>. 그는 알렉스 모친의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그녀를 강경 사회주의자로 정의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녀를 다른 사회에서도 존재하는 고전적인 구원자 신드롬을 가진 여성으로 묘사했다. 여기엔 구동독적인 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 크리스티아네로 출연한 카트린 사스(47)는 동독에서 가장 인기있던 배우 중 한명이었다. 감독은 그가 “절대 과잉되지 않는 연기를 선사한다. 내게 있어 영화는 눈에 관한 영화이기도 한데 그녀는 흔히 접하기 힘든 특별한 데가 있는 완벽한 눈을 갖고 있다”고 칭찬했다. 카트린 사스의 처지에선 그게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던 것 같다. “촬영은 정말 힘들었다. 그는 혹독했고 어떤 것이 어떻게 보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러나 촬영이 끝나면 그는 테디 베어와 같다. 그는 우리에게 팔을 두르고 선물을 주며 감사한다. 하지만 다음날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알렉스 역의 다니엘 브뢸은 국내 개봉작 <신과 함께 가라>에서 꽃미남 수도사 아르보로 출연한 뒤 곧바로 이 작품에 뛰어들었다. 러시아 교환학생 라라 역의 슐판 카마토바는 실제 러시아 출신으로 <루나 파파>와 <투발루>를 통해 낯익은 배우다. <아멜리에> O.S.T를 담당했던 얀 티에르센이 미니멀리스트적인 음악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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