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왜 할리우드는 일본 문화에 열광하는가? [1]
2003-12-05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라스트 사무라이> <킬 빌> 등 일본 문화에 중독된 할리우드의 징후를 읽다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에서 촬영한 영화이니 처음으로 일본에서 상영하는 것도 당연한 일일까? 도쿄의 워너브러더스 시사실에서 만난 <라스트 사무라이>는 모든 일본인들이 열광할 만한 영화다. <라스트 사무라이>는 동양을 그린 서구영화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나 편견에서 벗어나, 진지하면서도 경외어린 시선으로 근대 일본의 격동기를 바라본다. 영화 자체의 장점들도 많이 있지만,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은 서구인들이 일본 문화에 매혹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였다. 동양을 신비 아니면 야만으로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함정에서 서구인들은 과연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지 <라스트 사무라이>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일본 애니메이션과 망가는 미국 대중문화의 주류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상태이고, 다양한 분야에서 이런저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와 함께 일본 문화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일본 문화의 어떤 면에 이끌리는지에 대한 다양한 논의도 시작되었다. 그 논의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에, <라스트 사무라이>의 자장 안에서 일본 문화의 매혹적인 요소들을 거칠게 떠올려봤다. 한없이 부족하지만, 이건 미국 군인 알그렌이 사무라이의 마을에 기거하면서 느낀 감정들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조금씩 (대중) 문화적 풍경들을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심상 같은 것들.


<라스트 사무라이> 홍보를 위해 일본 찾은 톰 크루즈(가운데).

지난 11월20일 <라스트 사무라이>의 공동 기자회견과 시사회가 열린 장소는 일본 도쿄의 중심가에 위치한 롯폰기 힐스다. ‘힐스’라는 단어에서 ‘베벌리힐스’ 등의 고급 주택가가 연상되지만, 롯폰기 힐스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다. 올해 초 개장한 롯폰기 힐스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도시 속의 문화 도시다. 롯폰기 힐스 안에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직장과 거주지, 극장과 쇼핑가 그리고 레스토랑 같은 일상적 공간은 물론이고 전통식 일본 정원과 사찰까지 ‘힐스’에는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 모든 것들이 효과적으로, 그리고 예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곳에 들어서면, SF영화에서 흔히 보던 쾌적한 미래도시의 냄새가 풍긴다.

하루에 10만명이 모여든다는 롯폰기 힐스를 처음 본 것은, 지난 봄의 TV 화면을 통해서였다.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일본 시사회 행사가 열렸다. 키아누 리브스와 로렌스 피시번 등이 야외 무대에 서서 인사를 한 뒤 갑자기 모든 조명이 꺼졌다. 그리고 롯폰기 힐스가 <매트릭스>의 상징색인 녹색으로 물들고 동시에 도쿄 타워까지 녹색으로 변했다. 현실과 가상, 동과 서의 경계를 무너뜨린 <매트릭스>의 이미지는 그 순간 롯폰기 힐스를 넘어 도쿄 전체로 확장되는 느낌이었다. 전통과 첨단, 동양과 서양이 가장 극적으로 공존한다는 일본에서, 롯폰기 힐스는 그런 포스트모던의 상징이 되었다.

지금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문화는, 미국에서 발원한 팝 문화다. 영화와 음악부터 NBA와 리바이스까지 미국의 문화상품은 전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 눈에 띄는 것은, 일본 문화의 감염이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문화 상품들에도 일본 문화의 흔적과 인용이 두드러진다. 영화를 보면 최근의 화제작 <매트릭스3 레볼루션>과 <킬 빌>이 직접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과 액션영화의 영향을 과시한다. 일본 대중문화는 지금 전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그런 일본 대중문화의 힘은 롯폰기 힐스의 풍경에서도 드러난다.

세계의 예술가들이 만든 특이한 모양의 벤치가 곳곳에 놓여 있고, 갖가지 명품점들이 눈을 자극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에도시대부터 내려왔다는 정원이 보인다. 마음의 평화를 원하면 사찰도 있다. 롯폰기 힐스는 철학의 패스트푸드점이라 불렸던 <매트릭스>처럼,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존재한다. 차가운 인스턴트 음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직장인을 위해 밤 10시까지 여는 미술관을 보면 그런 힐난도 잦아든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쨌건 일본인은 그 사소한 모든 것을 상품으로 꾸며내고 선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과시한다. 일본인은 자신의 문화상품을 정말 세심하고도 집요하게 만들어낸다. 보는 순간 감탄을 자아내고,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오밀조밀함에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 안에는 동과 서, 성과 속, 과거와 미래가 함께 뒤엉켜 있다. 그러면서도 그 뒤엉킴이 별반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롯폰기 힐스, 일본 문화의 한 모습이다.

<라스트 사무라이>
<킬 빌>

롯폰기 힐스에 위치한 하얏트호텔에서 벌어진 <라스트 사무라이>의 기자회견은 거의 ‘일본 문화 예찬’ 일색이었다. 일본 배우들만이 아니라 에드워드 즈윅 감독과 톰 크루즈 역시 끊임없이 ‘사무라이 스피리트’를 입에 올렸고, 약자를 보호하고 군주에게 충성하는 무사도 정신은 세계 어디에서나 공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라스트 사무라이>를 보면 세계 어디서나 기꺼이 공감할 것이다. 80년대에 만들어진 <쇼군> 같은 영화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신비하면서도 야만적인 동양을 정복한다는 가치관이 노골적으로 깔린 <쇼군>과는 달리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을, 동양을 경애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동양을 신비 아니면 야만으로 획일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의 흔적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굳이 한마디로 말하자면 <라스트 사무라이>는 일본과 동양에 대한, 최선의 의도를 가진 상업영화다.

에드워드 즈윅이 <라스트 사무라이>를 만든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에드워드 즈윅 감독이 처음 일본영화를 본 것은 17살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를 본 에드워드 즈윅은 자신의 미래를 영화로 결정했다. 이후 구로사와 아키라의 모든 영화는 물론이고 다양한 일본영화를 보았고, 일본 역사에 관한 책들도 다양하게 읽었다. <매트릭스>의 워쇼스키 형제와 <킬 빌>의 쿠엔틴 타란티노가 일본 만화와 영화를 통해 일본 문화를 받아들인 오타쿠인 것에 비해, 에드워드 즈윅은 정통으로 일본을 받아들인 학구파였다. <킬 빌>에서는 여전히 동양인에 대한 조롱의 시선이 엿보인다. 하토리 한조나 일본 야쿠자들의 모습은 어딘가 우스꽝스러워 보이고, 약간은 허탈한 웃음도 있다. 조롱의 시선까지도 ‘빌려온’ 타란티노와는 달리 에드워드 즈윅은 정면으로 일본 문화와 역사를 조명한다.

<라스트 사무라이>의 시대는 1877년. 막부정치가 끝나고 천황이 중심에 섰지만 여전히 일본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새로운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개화파와 전통적인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는 보수파 사이의 갈등은 내전 상태를 초래한다. 개화파가 추진하는 신식 군대의 훈련을 위하여 초빙된 북군 출신의 알그렌 대위(톰 크루즈). 알그렌은 명예를 중시하는 군인이었지만, 커스터 장군의 지휘하에 자행된 인디언 학살 이후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태평양을 건너 일본으로 온 알그렌은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징집병을 데리고 전투에 나섰다가, 개화파에 반대하는 카츠모토(와타나베 겐)의 포로가 된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알그렌의 질문에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답하는 카츠모토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까지 마을에 머무르라고 명령한다. 부상당한 상처가 아물고, 군복 대신에 일본 옷을 걸치고 목검을 휘두르게 된 알그렌은 미국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을 그 평화로운 마을에서 되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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