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복수극, <맨 온 파이어>
2004-09-21
글 : 김용언
하드보일드한 보디가드가 롤리타와 ‘킬 빌’의 임무 사이에서, 혹은 B무비의 정서와 A급 웰메이드 영화의 중간에서 애매모호하게 서성거린다.

80년대 혜성같이 등장하여 광고계에서 갈고닦은 화려한 비주얼로 영화계의 ‘때깔’을 바꿔놓았던 일군의 감독들 중 선두주자는 단연 토니 스콧이었다. <탑건>이라든가 <악마의 키스> <폭풍의 질주> <트루 로맨스> <크림슨 타이드> 등으로 명성을 날렸던 토니 스콧은 90년대 중후반에 들어오면서는 방향을 잃은 듯했다. 토니 스콧보다 훨씬 스타일리시하고 야심만만한 신진감독들이 속속 등장했고, 90년대 후반에 내놓았던 <더 팬>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스파이 게임> 등의 액션스릴러들은 여전히 근사한 화면을 보여주지만 그에 걸맞은 내러티브의 개연성과 깊이를 잃은 채 표류하고 말았다. 한마디로 토니 스콧의 위치는 화려했던 과거에 비해 몹시 어정쩡해졌다. 그러던 차에 그가 <미스틱 리버>의 작가 브라이언 헬겔런드와 손잡고 A. J. 퀸넬의 하드보일드한 소설 <맨 온 파이어>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뭔가 절치부심한 결과물이 나오겠다라는 기대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야기는 아름답고도 더러운 도시 멕시코시티의 충격적인 일상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남미에서는 한 시간에 한건꼴로 유괴사건이 발생한다. 그들 중 70%는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전 CIA 전문암살요원 존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과거의 악몽 같은 기억을 잊지 못한 채 알코올에 의지하며 정처없이 떠돌다, 옛 동료 레이번(크리스토퍼 워컨)의 권유로 멕시코시티에서 보디가드로 일하게 된다. 그가 맡은 임무는 청년 사업가 사뮤엘의 아홉살짜리 딸 피타(다코타 패닝)를 보호하는 것. 크리시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피타를 거부하지만 점차 그녀의 진심어린 애정에 동화된다. 그러나 피타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정체 모를 사내들에게 유괴되고 그 와중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던 크리시는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피타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죄책감과 분노에 치를 떨던 크리시는 피타의 유괴에 관련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고 잔혹한 복수를 계획한다.

영화의 핵심은, 그러니까 2시간20여분에 달하는 기나긴 복수극에 심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기 위한 필수적 장치는 피타와 크리시의 유대 관계에 대한 공감이다. 배우들 자체에는 그리 나무랄 데가 없다. 덴젤 워싱턴은 선악이 모호한 크리시라는 인물의 장면장면을 완벽하게 체현해내고, 다코타 패닝은 ‘신동’이라는 표현이 진부할 정도로 똑 부러지는 연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두명의 프로페셔널 사이에는 화학작용이 없다. 남부러울 것 없는 부유한 환경에 속한 피타가 대체 왜 자신의 ‘일개’ 보디가드에게 그토록 진지하게 ‘구애’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무하다. 피타는 그저 크리시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셈이며, 영화는 크리시에게도 그리고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도 피타의 진심을 믿으라고 지속적으로(별 효과는 없지만) 강요한다. 다시 말해 <보디가드>와 <레옹>을 기묘하게 뒤섞어놓은 전반부는 주인공인 크리시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 과도한 감상주의를 진득한 설탕시럽처럼 두텁게 뿌려대면서 동시에 그것이 ‘현실적’으로 보이도록 진지하게 노력한다. <보디가드>나 <레옹>처럼 아예 소프 오페라적인 멜로드라마로서의 과도한 감상주의를 대놓고 인정하지도 않으면서, 거꾸로 어린 소녀와 나이든 보디가드 사이의 다정한 교감이 ‘지나치게 조숙한 꼬마’로서의 다코타 패닝과 불편하게 결부되면서 롤리타의 가능성을 떨쳐버리지도 못하게끔 한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레옹>처럼 과도한 ‘롤리타적’ 감상주의를 멋지게 끌어내지도 못했고, <보디가드>처럼 섹슈얼한 판타지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심지어 유사 부녀적인 절절한 애정도 아닌 어정쩡한 무엇이 되고 말았다.

“복수는 차게 해야 맛있는 음식 같다”는 구절이 <킬 빌>에 이어 <맨 온 파이어>에서도 또 한번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새로운 삶의 시작을 무참하게 파괴해버린 이들에 대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복수극이라는 점에서 <맨 온 파이어>는 <킬 빌>과의 비교에서, 혹은 포스트 9·11시대를 살아가는 미국사회라는 레퍼런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일단 여기에는 지금까지의 젠틀하고 멋진 덴젤 워싱턴의 이미지를 충격적으로 뒤엎는 몇몇 장면이 분명 존재한다. 거의 항상 정의의 사도로 등장하던 워싱턴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악당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잘라내는 등의 장면은 기묘한 반전과 위반의 쾌감을 선사한다. 하지만 <킬 빌>에서와 같은 차가운 아이러니와 조롱의 즐거움은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토니 스콧은 크리시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과도한 종교적 이미지를 이용, 개연성을 부가하려고 심각하게 노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리시는 하드보일드한 예수 혹은 유다의 이미지다. 그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죄악에 고통받고 자살을 기도하지만 ‘거짓말하지 않는’ 총알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뒤 쏟아지는 빗속에서 정화된다. 또한 피타의 죽음 이후 그는 구약성서의 법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성서의 ‘잔혹한 신’의 법칙을 직접 실행한다. 나를 분노케 한 자, 그만큼 당하리라. 잔혹한 죽음장면에서 시도 때도 없이 울려퍼지는 성가풍의 음악과 자신의 희생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을 구한다는 장엄한 엔딩 역시 희생과 순교의 과다한 정열을 관객에게 거의 숨막힐 지경으로 강요한다. 테러당한 이후 직접 테러하는 쪽으로 급선회한 뒤, 스스로를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여기는 미국의 일련의 ‘오버’가 이 영화에서 종교적 정열의 과잉으로까지 포장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맨 온 파이어>는 심각한 자아 도취로부터 구원받지 못했다.

:: <맨 온 파이어>의 과거

크리시역은 원래 말론 브랜도였다?

A. J. 퀸넬의 원작소설은 지금까지 두번 영화화됐다. 이미 20여년 전부터 이 소설을 점찍고 있던 토니 스콧은 원작의 배경인 이탈리아에서 촬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당시 그의 연출작 <악마의 키스>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제작자들의 우려로 영화는 무기한 연기되고 말았다. 처음 크리시 역으로 말론 브랜도를 염두에 두었던 스콧은 자꾸 살이 찌던 브랜도 대신 로버트 드 니로를 캐스팅했으나, 영화 제작이 미뤄지는 바람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덴젤 워싱턴으로 교체하게 된 것이다.

토니 스콧보다 한발 앞서 등장한 엘리 슈라키의 1987년작 <맨 온 파이어>에서 주인공은 <양들의 침묵>의 연쇄살인범 스콧 글렌이, 어린 소녀 역은 당시의 신성 제이드 말이 맡았다. 영화의 오프닝은 이미 죽어 가방 속에 던져진 스콧 글렌의 시체로 시작하고, “난 이렇게 죽었다”라는 망자의 첫 내레이션은 뻔한 복수극에 소름 끼치는 기이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영화는 후반부 복수극에 대비하여 소녀와 보디가드가 친해지는 전반부를 지나치게 느리다고 여길 정도로 세심하게 진행시키며,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 버전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벌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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