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세상 모든 동화들의 아름다운 시작, <네버랜드를 찾아서>
2005-02-22
글 : 김혜리
J. M. 배리의 걸작 <피터 팬>의 프로덕션 노트.

피터 팬은 해마다 웬디를 찾아오겠다던 약속을 잊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우를 잊었다. 메리 포핀스가 돌보던 뱅크스가의 아기들은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다. 동화들은 그런 식으로 넌지시 우리에게 경고했다. 너희는 중요한 것을 기어코 잃어버릴 거라고, 위안이 있다면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 깡그리 망각한다는 점뿐이라고, 어른의 쓸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든 순정한 아름다움에는 ‘흑막’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 것은. 판타지는 언제나 어둡고 두려운 무엇인가의 대극으로 존재한다. 그들은 타는 목마름이 길어올린 샘물이고, 갈 데까지 간 불면이 붙든 최면술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피터 팬>(1904년 초연)의 사연을 캔다. 영원한 유년을 구가하는 판타지가 작가 제임스 매튜 배리(1860∼1937)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2년의 시간을 추적하고 상상한다. 따라서 <네버랜드를 찾아서>는 J. M. 배리의 전기영화라기보다 피터 팬의 전기영화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집안의 자랑거리였던 형이 어머니의 웃음과 시선까지 가지고 세상을 떠난 날부터 J. M. 배리(조니 뎁)는 네버랜드를 꿈꾼다. 죽은 장남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소년은 형이 네버랜드라는 땅으로 갔다고 상상한다. 그러나 네버랜드에 꽃이 피고 아이들과 해적이 달리게 된 것은 배리가 데이비스 가족을 만난 뒤부터다. 영화에 따르면, 1903년 런던의 극작가 J. M. 배리는 새 작품의 초연에 실패한 다음날 산책길에서 데이비스가의 순수한 네 형제와 그 어머니 실비아 르웰린 데이비스(케이트 윈슬럿)를 만난다. 배리는 그들과 정신적 가족을 이루지만, 기침발작으로 시작한 실비아의 깊은 병은 배리를 다시 쫓기게 한다. 죽음이라는 악어는 다시 시계를 째깍대며 그를 뒤쫓는다.

배리의 진짜 가족인 아내 메리(라다 미첼)는 그의 천진한 장난에 더이상 웃지 않으며, 부부는 서로의 입술에 키스하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그들이 밤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침실 문을 열 때, 메리의 방은 동굴처럼 컴컴하지만 제임스의 문 안에는 푸른 하늘과 언덕이 기다리고 있다. 외로운 아내는 조용히 불평한다. “당신과 결혼했을 때 나는 생각했어요. 재능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장소가 있고 언젠가 당신은 나를 그곳에 한번쯤 데려가줄 거라고. 그러나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그렇다면 실비아가 그의 참사랑일까? 아마도. 그러나 배리의 감정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애정보다 더 크고 뿌리 깊은 욕망이다. 실비아와 그녀의 네 아들을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세계로서 사랑하는 배리의 감정은 초점이 불분명하다. 오히려 <피터 팬>의 창작에 있어 결정적인 축은 데이비스가의 예민하고 회의적인 셋째아들 피터와 배리의 관계다. “믿으면 이루어진다” 고 말하는 어른아이 배리와 “그건 그냥 연극일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애어른 피터는, 비상하는 피터팬과 그를 잡아당기는 그림자를 보여준다.

다만 <네버랜드를 찾아서>가 <피터 팬> 창작배경을 사실 그대로 고증했거나 몰랐던 비밀을 발굴했다고 믿으면 오해다. 특히 편의적 각색으로 비판받을 만한 부분은 몇몇 사건의 연대 조작. 영화는 실비아를 처음부터 홀어머니로 설정했지만, 실제로 J. M. 배리가 데이비스가의 친구가 됐을 무렵 아이들의 아버지 아서 데이비스는 살아 있었고 배리와도 우정을 쌓았다. 한편 배리의 아내가 길버트 캐넌과 새로운 관계에 돌입한 시기도 영화보다 훨씬 늦어 <피터 팬> 초연 4년 뒤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앞당김에 따라 실제로 넷이 아니라 다섯이었던 데이비스 형제 중 갓난 막내 니콜라스도 영화 속에서는 사라졌다. <피터 팬>을 낳은 영감을 설명하는 작품의 목적에 맞게 사실을 선택했다는 것이 제작진의 해명이다. 소년들에 대한 배리의 각별한 사랑에 대해 현대 관객이라면 품을 법한 소아애(pedophilia)에 대한 의혹도 전혀 흔적이 없다. 이에 대해 마크 포스터 감독은 데이비스가의 사람들과 역사가, 지인들의 증언에 따른 자신있는 결론임을 이미 단호하게 밝혔다.

하지만 <네버랜드를 찾아서>에서 무엇보다 할리우드적인 터치는, 조니 뎁의 캐스팅이다. 실제의 배리보다 배리가 꿈꾸었을 법한 셀프 이미지에 가까워 보이는 뎁은 <베니와 준>의 샘이 슬쩍 비쳐나오는 연기로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중년 남자를 거부감 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덜 자란 어른의 배역에 기교를 과시할 법도 하건만 조니 뎁은 그 어느 때보다 절제한다. 바리톤의 덤덤한 조크를 연신 날리는 제작자 찰스 프로먼 역의 더스틴 호프먼도 즐거운 볼거리. 한때 스스로 후크 선장이었던 그가 “타이거 릴리, 스미, 후크? 이름들하고는, 쯧쯧” 하는 장면은, 잭 스패로우의 해적 분장을 다시 한 조니 뎁과 함께 추억을 깨운다.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또 다른 보물은 피터 역의 프레디 하이모어. 울음을 터뜨리지 않은 채 놀랄 만큼 오래 눈동자에 눈물을 담아두는 이 소년은 <찰리와 초콜렛 공장>에도 발탁됐다.

예술가 중에서도 작가의 작업은 시각적으로 가장 심심한 구경거리다. 그러나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시나리오는 배리와 데이비스 가족이 나눈 추억 하나하나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피터 팬>의 장면들에 새로운 빛을 던지게 한다. 영화 전체를 창작 과정에 대한 하나의 코멘터리처럼 만든 것이다. 아이들과 뛰노는 배리의 눈은 이미 <피터 팬>의 무대를 보고 있다. 이 전략은 <빅 피쉬>나 <헤븐리 크리처스>에서처럼 수시로 천연덕스럽게 현실에 틈입하는 판타지들로 완성된다. 공원은 서커스로 둔갑하고 깐깐한 외할머니의 손에는 갈고리가 돋아난다. 현실과 환각,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이 황홀한 트랜스(trance) 상태는 극도로 쇠약한 실비아를 위해 집에서 공연하는 <피터 팬>의 무대가 돌연 총천연색 네버랜드로 확장되는 순간, 절정에 달한다. 이미 사람이 아니라 천사처럼 보이는 병약한 실비아가 식구들을 등지고 아름다운 네버랜드 속으로 걸어들어갈 때, 우리는 삶의 불가피한 패배와 그것을 어루만지려는 안간힘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목격한다. 그것은 극단적 도피인 동시에 유일하게 가능한 투쟁으로 보인다.

감독 마크 포스터는 누구?

사색적이고 음울한 영상미학, <몬스터 볼>로 부상

지금쯤 할리우드에서 마크 포스터 감독의 별명은 혹시 ‘우울한 녀석’이 아닐까. <LA타임스>의 성의있는 집계에 따르면 마크 포스터는 길지도 않은 필모그래피에서 사형수 처형, 불치병, 유아 급사 증후군, 자살 2건, 교통사고 2건, 인종주의와 가난을 다루었다. <필름 스래트>는 포스터의 출세작 <몬스터 볼>을 가리켜 “할리 베리의 누드를 보는 일을 우울한 경험으로 만들어버린 놀라운 영화”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180cm가 넘는 장신에 쾌활한 성격이지만, 마크 포스터 감독은 어두운 소재에 대한 유난스런 이끌림이 개인적으로 겪은 비극에 대한 애도의 연장이라는 점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1969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스위스의 스키타운 다보스에서 자랐다. 12살에 생애 최초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을 보고 뜻을 품은 포스터는 뉴욕대 영화과에 합격했다. 그러나 병원을 접고 연구소를 차렸던 아버지가 파산과 동시에 암으로 인한 시한부 생명 선고까지 받으면서 포스터의 가족은 곤경에 처했다. 게다가 마크 포스터의 형도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마크 포스터는 스위스의 부자들에게 무작정 후원을 구하는 편지를 보냈고 장학금을 얻어냈다. 대학 졸업 뒤에는 유럽 방송사를 위한 다큐멘터리 2편을 찍었고 실험적인 뮤지컬 <라운저스>를 1996년 슬램댄스영화제에 출품했다. 그러나 톰 존스, 잉글버트 험퍼딩크 등 라운지 뮤직 가수들에 관한 이 영화는 음악 저작권 문제로 개봉하지 못했다. 마크 포스터는 LA로 이주했으나 4∼5년 동안 운이 열리지 않았다. 그동안 형이 목숨을 끊었고 암 선고 뒤 11년을 버텼던 아버지도 버틸 힘을 잃은 듯 세상을 떠났다.

기다림에 지친 포스터는 라다 미첼(<네버랜드를 찾아서>의 배리 부인 역)을 주연으로 유아 급사 증후군으로 아기를 잃은 젊은 어머니의 심리를 그린 고딕 호러를 2주 동안 디지털 비디오로 완성했다. <악마의 씨>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라이온스 게이트의 눈에 들었고, 영화사는 몇년 동안 할리우드를 떠돌던 초저예산영화 <몬스터 볼>을 빌리 밥 손튼 캐스팅을 책임진다는 조건으로 포스터에게 맡겼다. 그 다음은 알려진 대로. 할리 베리의 오스카 여우주연상 수상으로 마크 포스터의 입지도 하루아침에 표변했다. 참담한 비극을 인내와 절제의 손길로 그리는 <몬스터 볼>의 스타일은 신파극의 위험성을 무엇보다 꺼렸던 <네버랜드를 찾아서>의 제작자가 찾던 자질이었다. 마크 포스터의 차기작은 최근 촬영을 마친 이완 맥그리거, 나오미 왓츠 주연의 <스테이>. 자살하려는 학생을 막는 대학교수의 이야기라고 하니 사신의 그림자는 아직도 마크 포스터를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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