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쿠바영화의 상징, <저개발의 기억>
2005-03-10
글 : 김의찬 (영화평론가)

EBS 3월12일(토) 밤 11시

1960년대 쿠바영화에서 하나의 흐름을 이룬 것 중 하나는 현실에 관한 사실적 접근일 것이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당시 각광받았던 것인데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에 다큐멘터리가 적합하다는 이유가 컸을 것이다. 다른 극영화에서도 뉴스 필름이나 다큐적 기법이 많이 응용되곤 했다. <저개발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조금 과장되게 설명하자면, <저개발의 기억>은 해외에서 인정받은 최초의 쿠바영화라고 할 만하다.

이 영화는 일종의 정서적 여행을 통해 쿠바혁명 당시 한 지식인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저개발의 기억>은 세르지오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혁명이 시작되자 부모와 아내, 친구들이 혁명을 피해 마이애미로 떠나는 상황에서 그는 쿠바에 계속 남기로 결심한다. 혼자가 된 세르지오는 삶의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가족, 연인과 같은 과거를 추억하기 시작며 혁명 중인 사회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현실을 관망하면서 차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혁명은 점점 그에게 억압적으로 다가선다.

<저개발의 기억>은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것. 영화는 모호한 구석이 없지 않은데 영화 속 과거는 현재와 엇갈리고 픽션은 논픽션과 뒤섞인다. 그리고 이야기와 주인공 내면의 풍경이 교차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혁명이라는 불씨가 가져온 변화 탓이다. 영화 속 세르지오는 지식인의 상징처럼 등장한다. 그가 회상하는 과거의 여인들은 저개발의 상징이며 유럽 출신이며 독일인의 피가 섞인 한나는 유독 예외적 존재가 된다.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과 이데올로기의 허구가 밝혀지면서 지식인의 내면이 드러나는 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영화는 당시 뉴스 필름을 사용하면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여인의 나체를 자주 보여주면서 상업적 속성에 물든 영화적 흐름, 그리고 관객의 무의식까지 은근히 공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저개발의 기억>은, 쿠바혁명의 이면을 비추는 영화적 탐험인 셈이다.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감독은 이탈리아 유학 이후 쿠바로 돌아와 열정적으로 혁명운동에 동참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혁명의 역사>와 <관료주의자의 죽음> 등이 국제적으로 주목받았고 <저개발의 기억>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후 그는 <딸기와 초콜릿> 등의 영화를 만들면서 1996년 눈을 감기 직전까지 꾸준하게 작업했다. 남미영화에서 새로운 서사영화의 전통을 실험한 감독으로서,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감독의 <저개발의 기억>은 충분히 감상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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