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가이드]
막내린 ‘토지’ 3년 바친 이종한 피디
2005-05-27
글 : 김진철 (한겨레 기자)
사진 : 김태형 (한겨레 기자)
“내 연출인생 최후에 하고팠던 작품”
24일 오후 서울 목동 <에스비에스>사옥 드라마 연습실에서 이종한 피디가 <토지>에 매달린 3년의 대장정을 풀어놓고 있다.

지난해 11월 시작한 드라마 <토지>가 지난 22일 52부의 막을 내렸다. 한반도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절절이 표현된 영상미는 소설과는 또 다른 감동을 안겨줬다. 평균 가구시청률 23.3%(티엔에스 미디어코리아)로 뛰어난 흥행 성적도 거뒀다. 굳이 범람하는 트렌디물과 견주지 않아도, 대하소설 <토지>의 완결판을 담아낸 것만으로도 뜻깊은 작업이었다.

<토지>를 위해 오롯이 3년을 지낸 이종한 피디는 “자꾸 녹화하러 가야 한다는 착각이 들어 혼란스럽다”며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른 체구의 이 피디는 5㎏ 이상 살이 내렸다. 매주 경남 하동과 강원도 횡성을 오가는 ‘고행’이 이어진 탓이다. 무엇보다 대작의 무게에 짓눌려, “심상을 영상화하는 작업”에 ‘작가’의 고뇌가 더욱 깊었다.

“생명사상 빛나는 대작”
촬영 위해 보리·수수밭 일궈
“친정 연극판에 빚진 마음”

지쳐보였지만 눈빛은 반짝였다. 이른바 ‘문예피디’의 ‘작품’을 대하는 진지함과 겸손함이 잔잔했다. “<토지> 작업을 전반적으로 정리할 계획”이라는 그는 아직 다음 작품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24일 늦은 오후 서울 목동 <에스비에스> 드라마 연습실에서 그를 만났다.

자연…=이 피디의 화두는 내내 생명이고 자연이었다. “생명은 가장 근원적인 문제이고, 이를 가장 잘 구현하는 것이 자연”인 까닭이다. 1989년 <왕룽일가>부터, <분례기>(92년) <관촌수필>(93년) <왕룽의 대지>(2000년)까지 이어지는 그의 작품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토지>에 이르러 만개했다. “사실 제 연출 인생의 가장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작품이었어요. 생명 사상이 빛나는, 감히 드라마로 만들 생각도 하기 어려운 대작이죠. 기회가 좀 일찍 왔어요.”

그에게 욕심이 일었던 까닭이다. 꼼꼼한 그는 2003년 여름 하동 땅 ‘최참판 댁’에 나무를 심었다. 그해 가을 들판엔 보리 씨앗을 뿌리고, 이듬해 겨울 파릇파릇 올라오는 푸르른 싹을 보며 흐뭇했다. ‘용이네 집’ 앞엔 수수밭을 일궜다. 토종꽃도 여기저기 많이 심어뒀다. 원작에 나오는 대부분의 나무와 작물들을 농민 3명의 품을 사, 심고 가꿨다.

“사전 제작이어서 가능했다”지만, 연기자·스태프보다 하루 먼저 6㎜ 카메라를 들고 촬영지에 내려가 각종 풍광을 담아낸 것은 자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촬영 내내 한없는 외로움을 느낀 그는, 때마다 지리산에 들어가거나 섬진강을 바라보며 “나에게 힘을 주소서”라고 외쳤다.

인간!=생명 사상에서 비롯해, 자연은 인간으로 이어진다. “인간도 자연처럼 생명을 유지하려는 본능이 있어요. 그러나 인간은 유한성 때문에 한이 있죠. <토지>는 한을 풀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애 없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죠.”

박경리 작가의 작풍과도 맞닿는다. “최유찬 연세대 교수 말대로, 박경리 선생의 극작술은 에우리피데스 작법과 이어지는 측면이 있어요. 사건 자체 보다는 사건이 일어난 뒤의 영향, 곧 사람들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거죠.” <토지>에 나오는 인물 600명이 모두 개성을 지닌 까닭이다.

캐스팅에 전력을 다했다. 유례없는 오디션도 여러 차례 거쳤다. 아역 배우 오디션에는 600명이 몰렸고, 귀녀 오디션에도 영화·연극·티브이에서 활동 중인 배우들이 15명이나 찾아들었다. 성인 역할 모집에 몰린 300여명 중 뽑힌 20명은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냈다.

“사실 배우들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거예요. 그렇지만 정말 <토지>를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오디션에 응했겠죠. 이들이 정말 <토지>를 살렸어요.” 시청자들이 “누구지? 연기 잘 하네?” 했던 사람들은 거의 공개 오디션을 통과한 연극 배우 출신이라고 귀뜸했다.

예술?=이 피디는 원래 ‘연극쟁이’였다. 경북 안동 출신에 ‘딴따라’ 하지 말라는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중앙대 연극학과 71학번으로, 극단 가교와 현대극장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다. 그러다 81년 한국방송 피디로 들어갔다. 에스비에스로 옮긴 뒤인 94년 <세일즈맨의 죽음>을 만들기도 했지만, 마지막 연극 작품이 되고 말았다.

연극계에 몸담았던 기억은 그에게 ‘빚’과 같다. “배가 고파서 방송 쪽으로 왔지요. 그렇지만 고향인 연극을 생각하면, 더 열심히 드라마를 만들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국방송 입사 뒤, 입봉작인 <왕룽일가>에서 그는 박인환과 ‘쿠웨이트 박’ 최주봉을 캐스팅했다. “9년 동안은 미안해서 데려오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연극계에서 ‘한 가닥’씩 하는 사람들도 방송에선 엑스트라 역할밖에 주지 않아서였다.

드라마가 더는 ‘예술’이 아닌 지금도, 그는 ‘문예피디’라는 이름표를 달고 ‘작품’을 만들려 애쓴다. ‘대박’ 드라마 하나에 프리랜서로 나서는 피디들이 줄을 잇는 중에, 그가 방송사에 머무는 것은 “밖에 나가면 경제 논리에 휘둘려 ‘작품’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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