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청춘의 덫을 빠져나온 전사, <제5원소>의 밀라 요보비치
2000-02-29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여배우에게 아름다움은 덫이 되기 쉽다. 배우를 지망하는 소녀에게 아름답다는 것보다 더 유용한 무기는 없겠지만, 그 쉬운 시작에 기대는 순간, 배우가 스크린 속에서 생명 없는 정물로 머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밀라 요보비치(24) 역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었다. 녹색의 돌덩이처럼 차가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도록 투명한 눈동자, 동유럽의 혈통을 내비치는 강한 윤곽의 얼굴선 덕에 그녀는 “10대에 이미 백만장자가 된” 톱모델이었다. 고작 11살의 나이에 패션잡지 <마드모아젤>의 표지를 장식하며 데뷔한 이후, 모델로서 요보비치의 경력은 흔들림이 없었다. 표정없는 얼굴만으로도 이면에 도사린 어두운 관능의 그늘로 끌어들이는 요보비치는 한번도 깜찍한 요정이었던 적이 없기에 성인으로의 힘든 도약을 거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그녀에게 나이를 뛰어넘는 아름다움은 오히려 장애였다

셔릴린 펜의 여동생 중 한명이었고 <투 문 정션>으로 연기를 시작한 10대 시절, 요보비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은색 스크린에 한겹의 빛을 더 입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브룩 실즈의 뒤를 이었던 <푸른 산호초2>에서 요보비치는 낙원을 장식하는 화려한 열대의 꽃이었으며, 크리스천 슬레이터의 여자친구로 출연한 <초보영웅 컵스>는 그 인상적인 아름다움조차 지워버렸다. 계속되는 사춘기의 좌절은 그녀를 배우로 만든 어머니에 대한 반발과 탈선으로 이어졌다. 밤마다 계속되는 파티와 끊임없이 피워대던 담배, 몇주 만에 끝장난 충동적인 결혼. 결국 연기를 포기한 그녀는 94년, 동유럽 민속음악풍의 앨범 <The Divine Comedy>를 발매하며 다른 곳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뤽 베송의 <제5원소>와 함께 찾아왔다. “<제5원소>를 찍기 전에 연기는 그저 항상 해왔던 일에 불과했다. <제5원소> 이후, 연기는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어찌 보면, ‘완벽한 존재’이자 ‘절대선’인 <제5원소>의 릴루는 어느 때보다도 전형적인 미인의 틀에 갇힐 수 있는 역이었다. 그 전형성을 뤽 베송은 오렌지색 머리와 붕대 의상의 펑크적인 이미지로 깨뜨렸고, 요보비치는 거리낌없이 연기에 몰입했다.

다시 한번 뤽 베송과 작업한 <잔 다르크>의 요보비치에겐 화장기마저 남아 있지 않다. 사랑과 분노와 날선 자존심 사이에서 홀로 분열하고 세상을 오해하는 잔 다르크. 병사들을 헤치고 나가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엔 분열의 흔적처럼 핏발이 뚜렷하다. 뤽 베송은 “<잔 다르크>를 찍는 동안 요보비치는 에너지가 넘쳤다. 촬영이 끝날 무렵에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고 말한다. 페이 더너웨이와 더스틴 호프먼, 존 말코비치의 그늘에 가렸다는 평에도 요보비치는 “그들을 두려워할 시간도 없었다. 촬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기회였다. 매일같이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세요! 나는 당신에게 배우고 싶어요!’라고 외치곤 했다”는 영악함을 보인다. 감정의 선을 조절하지 못하는 요보비치는 아직 연기로 승부한다고 말할 수 없는 배우지만, 준비는 돼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본 빔 벤더스의 <밀리언달러 호텔>과 마이클 윈터보텀의 <킹덤 컴>이 요보비치의 차기작이다. 요보비치는 한번에 모든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확장하고자 한다. 아마도 그 의지는 보답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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