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단편애니의 세계에 빠져봅시다, ‘애니리퀘스트’
2005-09-02
글 : 주도연 (자유기고가)
안시·히로시마 등 세계가 주목한 단편애니메이션 모음전 ‘애니리퀘스트’

10살 때부터 유화를 그리기 시작해 13살 때 미대((Montreal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한 천재소년이 있었다. 이 소년은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음에도 수많은 애니메이터들이 꿈꾸는 캐나다국립영상위원회(NFB) 소속에 들어갔는데, 이때 나이가 19살. 이후 천재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기법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며 애니메이션 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부와 명예를 누리는 것도 잠깐. 장래가 촉망되던 이 애니메이터는 과다한 술과 코카인 중독으로 인한 후유증, 애인과 믿었던 친구들의 배신 등을 차례로 겪으며 전 재산을 날리고 만다. 작업장은 물론 살던 집까지 빼앗긴 그는 거리의 부랑자로 나선다.

마치 한편의 소설 같은 이 실화의 주인공은 라이언 라킨(Ryan Larkin).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제시하며 당시의 애니메이터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리의 노숙자로 머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그가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굴곡 많은 라킨의 삶을 그린 크리스 랜드리스 감독의 <Ryan>(2004)이 지난해부터 안시, 아카데미 등의 굵직한 시상식에서 대상을 타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 추상화를 보는 듯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트라우마까지 형상화한 이 독특한 CG애니메이션은 신선한 시각적 충격과 탄탄한 시나리오로 도입부터 종반까지 강력한 흡입력을 뽐낸다.

지난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2005에서 상영했던 <Ryan>을 놓친 이라면, 중앙시네마에서 열리는 ‘애니리퀘스트’ 상영전을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9월5일부터 29일까지 여는 이번 상영전에는 앞서 말한 <Ryan> 외에 라이언 라킨의 독특한 세계를 맛볼 수 있는 <Walking>(1968), 폴 드리센의 기묘한 상상력이 빛나는 사랑 이야기 <2D or not 2D>(2003), 이미지의 생성과 해체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Hunger>(1974)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상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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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작 소개

<Walking>

크리스 랜드리스 감독 <Ryan>의 작품 속 주인공이자, 그 자신이 촉망받는 애니메이터였던 라이언 라킨의 작품. 지우기 쉬운 목탄의 특성을 살린 스톱모션 기법을 개발한 라킨은 <Syrinx>(1966)에 그 기법을 적용해 주목을 받는다. 이 작품은 <Syrinx> 이후 애니메이션계에 라킨의 이름을 확실히 새기게 한 수작. 마치 로코 스코핑을 사용한 듯한 실감나는 인체 묘사와 다양한 포즈, 액션이 인상적이다. 수채 채색한 컬러링과 선화의 움직임은 음악의 비트에 맞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데,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하기도 한 라이언 라킨의 독특한 타이밍 감각이 돋보인다. 1968년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 후보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디즈니의 <곰돌이 푸> 시리즈에 자리를 내줘야 했던 작품.

<Hunger>

70년대 CG애니메이션의 실험작. 이미지의 수정이 쉽도록 흰 종이 위에 검정 라인만으로 제작한 이미지를 컴퓨터로 가공해 애니메이션을 완성했다. CG로 완성된 이미지들은 다양한 변형과 디졸브를 통해 끊임없는 이미지의 생성과 해체를 반복한다. 소유욕과 성욕 등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식욕에 빗대어 표현한 <Hunger>는 이미지의 생성과 해체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이 흑과 백의 강렬한 대조 속에 더욱 힘을 발한다. 아카데미상 후보, 칸, 베를린영화제 등 13개 영화제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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