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창동을 만나다 [2]
2000-01-04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글 : 황혜림

#4. “너 정말 삶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냐” “네?” “니가 그렇게 썼잖아, 일기장에.” 1987년 4월

공포에 질린 운동권 피의자 박명식과 능숙한 고문형사 김영호가 마주한 고문실. 그리고 전혀 엉뚱한 질문. 가학적이고 악랄한 형사, 평범한 서민 가장의 두 얼굴 사이에 김영호는 첫사랑에의 그리움을 아주 짧지만 진하게 드러낸다. 그럴 때마다 그는 다리를 전다.

=나는 관객이 여기 와선 김영호에게 동화되기를 바랐다. 최소한 연민은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가장 악랄하기도 해야 한다. 이때부터 내가 너무 힘들어졌다. <초록물고기> 때는 나는 이야기를 빠져나와서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빨려들어가 있었다. 특히 4번째 장에선 괴롭고 힘들었다.

-김영호가 박명식의 뺨을 때리는 장면은 그냥 징그럽고 끔찍하다. 왜 그렇게 찍었나.

=그 장면 찍기 전날 잠을 못 이루고 내내 악몽만 꿨다. 힘들었지만 그날은 특히 그랬다. 나는 이 장면은 이야기의 맥락보다 고통의 재현이 목표였다. 최소한 보는 사람들이 고통을 간접체험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만들어야지 재현될 게 아닌가. 김영호를 사디스트로 만들어야 했고 나도 그런 심리에 빠져들었다. 그게 전염이 돼서 모두들 굳어 있었다. 박명식은 맞더라도 얼굴을 절대 돌리지 말라고 주문했다. 맞아서 아픈데 왜 그래야 되느냐고 반문했지만, 난 끝까지 참기를 요구했다. 힘든 시간이었다.

-힘들어서 감독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육체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내 감정이 망가지는 게 힘들었다. 내가 나한테 상처주고, 남까지 미워졌다. 이건 위험하다. 그만큼 압력이 강하다는 거니까. 나는 이 판에서 버티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벗어던질 용기도 없다. 감독 일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으니까, 이러다가 갈 데까진 가겠지.

-감독 하면서 재미 느끼나.

=내가 재미있다는 게 아니라, 일이 그렇다는 거다. 투기성도 있고, 찍을 땐 굉장히 역동적이고, 반응도 크고 빠르다. 게다가 감독은 현장에서 싫어도 카리스마가 주어진다. 감독 하다가 그만 두면, 백수 외엔 할 일이 없다.

#5. “맞아, 내 손 참 착해요.” 1984년, 가을

수소문을 거듭해 찾아온 순임과 마주앉은 초보형사 김영호. 서투른 첫고문으로 피의자의 똥을 뒤집어쓴 손을 씻고 있을 때, 하필이면 찾아온 첫사랑. “꼭 딴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손을 보니까 영호씨 같네요… 뭉툭하지만 참 착해보이는 손….” 그 앞에서 김영호는 음산한 미소를 띠며 더러운 손을 들어올린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손을 쓰기 때문이다. 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라진다. 80년대를 돌이켜보면, 적어도 노동하는 손이 착한 손이라는 관념은 있었다. 그게 완전히 무너졌다. 내가 살아온 20년을 돌이켜볼 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이거다.”

문학이 혁명의 도구가 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할 때, 이창동 감독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전위는 아니었다. 인간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전략이 그에겐 없었다. 대신 인간 조건 깊숙이 파고들면서, 인간다움을 질문했다. ‘내 글이 무얼 할 수 있을까’ 하는 풀리지 않는 자책적 질문과 함께. 정답을 계몽하지 않고 끝없이 질문하는 태도는 80년대의 정치주의에 어울리는 문학적 실천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90년대가 왔다. 깊은 강은 멀리 흘렀다. 이창동의 소설에 ‘파시즘의 하수인’이란 극언까지 퍼부었던 강 위의 기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이창동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

“80년대 후반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이상, 인간다움, 순수 같은 말이 고리타분한 헛소리가 됐다. 세상이 변한 게 뭔데, 이상이 사라졌다고 말하는지 난 이해 못했다. 난 아직 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 별이 있는 것만큼 분명하게 그건 있다. 지금의 허무주의는 현상에 대한 반응일 뿐 해답이 아니다. 내가 글이나 영화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그저 촛불 같은 거다. 바람 불면 꺼지겠지만, 그래도 흔적은 남기는 것. 그 정도다.”

노동해야 할 손이 사람을 가학하고 오물 뒤집어쓰기를 강요받았던 20년사의 마지막 경유지는 광주다.

#6. “군화에 물이 차서 걸을 수가 없어요.” 80년 5월

결국 광주로 왔다. 면회온 순임을 만나지도 못한 채 트럭 문턱 너머로 물끄러미 지켜보다 광주로 온 김영호는 총상을 입고 공포에 떨다 오발로 여고생을 살해한다. 그리곤 얼이 빠져 고함친다. “빨리 집에 가란 말이야.” 이 하루로 그의 인생은 첫사랑과 다시 손잡을 수 없다. 영원한 다리 절기의 출발점.

=어떻게 80년을 말할 수 있을까. 80년 5월에 휴교령이 떨어졌을 때 난 4학년이었다. 친구집에 가서 세명이 고스톱을 쳤다. 그중 한명은 나중에 혼자서 유인물 만들어 배포하다가 잡혀갔다. 우리가 고스톱 치고 있을 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후에 알았다. 어떻게 우린 그랬으며 어떻게 광주에선 그랬을까. 몇 시간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상처를 짊어진 사회에 이상이 남아있을 수 있을까. 그 잔인성을 직접 말하지 않고 이걸 거쳐가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나.

=일상화할 건지 전형화할 건지를 고민했다. 일상성 속에 묻어서 표현하면 부드럽긴 할 거다. 그럴 수 없었다. 김영호의 착한 손에 피묻히는 것말고 표현할 길이 없었다. 리얼리티는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나면, 광주가 앞의 모든 이야기를 다 잡아먹을 거라는 점도 예상했다. 굳이 변명이나 위안을 말하자면, 이 영화가 광주로 가기 위한 여정은 아니라는 것, 각 단락이 그 자체로 현재성을 주는 거라고 스스로 설득하고 있는 정도다.

-광주에 대해, 해결이나 치유에 대해 유행처럼 말한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박하사탕>을 보면 근원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처처럼 보인다.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85년에 다섯살난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 고통은 비슷하게라도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가슴이 아프다는 게 비유가 아니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1년 동안 웃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했고, 같이 울어주던 사람도 있었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누구도 내 고통을 느끼진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함께 사회주의 예술론을 공부하던 사람들, 내가 동지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태도 때문에 상처가 더 컸다. 물론 슬퍼하고 위로했지만, 있을 수 있는 사고로 넘어가기를 권했다. 사람에 대해 좌절했다. 사람 사이의 심연을 메울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 빠졌다. 그때 한 학부형이 찾아와서 ‘우린 같은 배를 탔군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 사람도 자식을 잃었다. 그랬다. 우린 저주받은 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광주를 치유하는 것, 이해하는 것 다 불가능하다.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도리밖에 없다.

#7. “영호씨, 그 꿈이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네요.” 1979년, 가을

종착역. 스무살 시절. 공원 김영호는 동료 공원들과 함께 가을 소풍을 나왔다. 20년 뒤에 자살을 기도하게 될 바로 그곳. 맑은 햇살, 하늘거리는 꽃. 수줍은 처녀 윤순임은 순박한 청년 김영호에게 박하사탕 하나를 건네준다. “이곳은 처음인데 왠지 와본 것 같아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이창동 감독은 희망을 말하지만 그건 정말 별과 꿈처럼 아스라하다. 희망은 손닿지 않는 곳에 있다. 회의와 절망의 끝에 가서야 마치 계시처럼 멀리서 아른거린다. 첫사랑은 늘 상실의 대상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박하사탕>은 마치 희망의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근거가 내겐 없다. 다만, 지금 생을 개척하기 시작한 20대에겐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잃었다 해도, 난 그게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다. 난 확신범이다. 꿈같은 이미지로라도 그곳을 보여줄 수 있는 것.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다.

그의 소설 <하늘등>에는 별이 남다른 의미로 등장한다. 운동권 주변의 회의주의자였던 여대생 신혜는 극렬 운동권으로 오인받아 체포된다. 폭행과 성고문 끝에 4일 만에 만신창이의 몸으로 풀려난 신혜의 머리 위에 차고 맑은 겨울하늘과 별이 펼쳐져 있다. 별을 보고 주인공은 살아있다는 감정을 격렬한 오한과 함께 느낀다.

-살면서 그런 희망을 본 적이 있나.

=많지만 제일 선명한 게 있다. 철거민 판자촌에 살던 스무살 때 재수도 실패해서 아버지한테서 쫓겨났다. 섣달 그믐밤이었다. 죽으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복수하려고 했다. 자살만큼 좋은 복수는 없다. 그래도 그냥 죽을 순 없었다. 내 문학적 재능을 몽땅 쏟아부은 위대한 유서를 남길 생각이었다. 내 죽음을 모두 통탄해야 하니까. 친구에게 5천원 빌려서 신경안정제, 수면제 한 봉지와 볼펜과 종이를 샀다. 여관마다 방이 없어 산동네 여인숙 문간방에 들었다. 문제는 유서를 쓰려고 펜을 들었는데, 명작은커녕 첫줄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마음에선지 그 방에 새한테 약을 먹여 죽었다. 죽은 새 보니까, 죽음이 실감났다. 새벽에 도망나왔다. 그때 하늘의 별을 봤다. 심리적으로 자살을 경험한 뒤에 본 별은 너무 찬란했다.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 막 밀려 올라왔다. 그런 느낌으로 살고 싶었다. 내 스무살은 춥고 배고팠지만, 그래도 밑바닥엔 눈부신 게 있었다. 지금은 그 위에 너무 많은 게 쌓여버렸다.

-이 영화를 어떻게 보기를 기대하나.

=어둡게만 보지 말고 희망적으로 봐달라고 홍보용 멘트로 이야기해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그게 아니어도 좋다. 관객이 영화 속 인물의 감정에 이끌려줬으면 좋겠다. 냉소적으로 거리를 두고만 본다면 나로선 참혹한 일이다. 영화 보고 얹힌 것 같다, 답답하다고 하는 사람도 많다. 울지도 못하게 하느냐고. 나도 할말이 없다. 다만 감정이 조금이라도 움직여만 준다면 좋겠다. 다만, 젊은 세대들은 희망에 가까이 있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잃고서 다시 회복하지 못한 것을 그들은 잃지 않기를 정말 바란다.

"징글징글하지만, 사랑한 것 같애"

배우 설경구가 이야기 하는 이창동

몇 개월 동안 20년을 살아내야 했던 <박하사탕>은 설경구에게 아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영화”다. “<박하사탕> 때문에 알려진 배우”가 될 만큼 호평을 받고 있는 첫 주연작이기도 하지만, 촬영을 끝낸 9월말 기술시사를 한번 본 뒤엔 두번 다시 보기 힘들 정도로 고생스러운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박하사탕>이 “한 인물이 망가져가는 과정을 역순으로 따라가는 영화”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듯 “순수를 되찾아가는 시간여행”이기도 하고, 그 속에 첫사랑도 있고, 광주도 있다. 그 여행의 주인공 영호는 “표면적으로는 개떡 같고 그런 다중인격이 없는” 인물. “아내가 바람피웠다고 패고 돌아서서 바람을 피우고, 가혹한 고문을 가한 뒤 추악스럽게 노래방에서 예쁘게 노래하려 애쓰는”, 그러면서도 “나이 마흔에 철길에서 자살하는데, 그것도 끝까지 순수함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죽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가 아직 이르러보지 않은 나이 마흔. 게다가 모든 것을 잃은 남자의 그 막막한 절망과 교감하기 위해 서울역 지하도의 노숙자들과 지내기도 하고, 스탭이나 출연진들과 동떨어진 채 철저히 혼자가 되기도 했다.

불가능할 것 같던 이 고된 싸움을 이끌어준 것은 역시 이창동 감독이다. 촬영이 끝나고 한동안 설경구는 감독이 보기 싫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미처 영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때는 힘들었던 기억이 훨씬 많았고, 뒷말하기보다는 앞에서 드러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였다. 순임과 재회한 병실 앞에서 우는 장면을 찍을 때, “결론은 눈물인데, 7번 찍고는 참으려다가 터지는 뭔가가 빠진 것 같다며 다시 하자고 했다.” 돌아버릴 것 같아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데, 감독도 나와 서로 딴 데를 보며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돌아와 카메라 앞에서 콧물 끈적한 눈물을 보이자 비슷한 거 같다며 오케이가 떨어졌다. 체력도 바닥나 정신력으로 버틴 광주 장면에서는 반항도 했다. 감독은 폭력에 찌든 형사 영호가 순임을 떠나보내는 챕터 5가 잘 안 나와 챕터 6인 광주를 잘 살려야 한다며 긴장시켰는데, 하루는 8시간 강행군 끝에 상대 여고생 배역을 위해 또 연습하자고 했다. 설경구가 못하겠다고 하자 그 얼굴을 본 감독은 별말없이 직접 대본을 들고 영호의 대사를 맡아 리허설을 진행했다. 3개월이 지난 지금은, “감독님이 나 좀 욕하지 마라, 내가 너 잡은 줄 알겠다 하셨다. 사실 잡긴 잡았지. 그래도 감독님 사랑한 것 같애. 독하고 징글징글한 분이지만, 그래서 배역에 더 근접할 수 있었다”며 웃는다. 스무살의 야유회 촬영차 첫 장면을 찍은 진소천에 갔을 때 다리 공사로 수몰 상태라 촬영도 못하고 술을 마시던 밤, 마흔 넘어 엉엉 울면서 조감독을 했다는 이창동 감독의 초심을 들은 것도 잊을 수 없는 찡한 기억이다.

연기자들에게는 기회가 있으면 꼭 이창동 감독하고 일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상투적인 연기를 싫어하고, 10m를 가더라도 사건이 있어야 일상이라고 말하는” 이창동 감독에게서 얻은 배움이 크기 때문이다. “무섭진 않지만 내재된 카리스마, 감독님은 없다고 하지만 끈끈하고 야금야금 파고 들어오는 카리스마”가 있다. 표정 하나하나를 지적하기보다는 그 상황의 감정에 대해 충분히 얘기한 뒤 일단 합의가 되면 무조건 배우를 믿어준 것도 큰 힘이 됐다. 안 풀릴 때도 너무 많고, 단선이 아니라 복합다단한 감정인데 설명을 잘해주는 것도 설경구가 말하는 이창동 감독의 장기다.

최근 두달여 만에 <박하사탕>을 다시 보고, 그는 “삼킬 수도 뱉어버릴 수도 없는 영화, 눈물도 못 흘리게 하는 영화”라는 어느 관객의 평에 공감했다. 처음 시사를 보고 답답함을 느꼈던 것처럼, “즐거운 영화도 아니고, 그래도 삶이 아름다운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영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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