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브라이언 드 팔마와 마이클 만의 세계 엿보기
2006-10-10
글 : 김나형

평생 남자영화만 만들어온 감독이 있다. 브라이언 드 팔마와 마이클 만. 비슷한 연배로 태어난 두 사람은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할리우드에 뛰어들었지만 그들만큼 고상한 명성을 쌓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끝없이 변주해내는 남자와 여자, 범죄와 폭력의 음악에 사람들은 중독되고 말았다. 이들의 새 영화가 나오면 사람들은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라서’, ‘마이클 만 영화니까’ 극장을 찾는다. 그런 그들이 약간 시간차를 두고 새 작품을 들이댔다. 마이클 만은 자신이 제작에 참여했던 옛 TV시리즈(열혈 형사물!)를 영화로 되만들었고, 브라이언 드 팔마는 ‘블랙 달리아’로 불리는 미제 엽기 살인을 소재로 골랐다. <마이애미 바이스>와 <블랙 달리아>에 관심이 있다면, 왜 다들 ‘브라이언 드 팔마 영화’, ‘마이클 만 영화’를 연호하는지 잠깐 들여다봐도 좋을 일이다.

여자와 남자

브라이언 드 팔마

<필사의 추적>

브라이언 드 팔마의 영화는 명백한 남자영화지만 영화를 끌어가는 건 여자다. 그녀들은 예쁘지만 백치스러운 여자, 대개 창녀다. 우아한 금발에 장갑부터 구두까지 순결한 백색으로 치장한(유독 올 화이트로 빼입은 여자가 자주 등장한다) 그녀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채 (혹은 잘 아는 상태로) 과장되게 신음하며 온몸을 비비 꼰다. 남자들은 그런 몸짓에 매혹되어 불나방처럼 ‘버닝’한다. 언제나 여자가 먼저다. 그녀들은 표적이 되어 쫓기고, 남자는 그 뒤를 쫓는다. 비밀의 열쇠는 여자가 쥐고 있지만 그녀들은 (천성적으로 둔한 것인지) 쥐고 있는 게 뭔지도 모른다. 그 뒤를 쫓아 동분서주하는 남자들은 온갖 뒤치다꺼리와 손짓발짓을 해가며 그녀가 처한 위험을 알리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남자들은 변태로 낙인찍혀 손가락질받는다. 창녀와 변태. 드 팔마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회적,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때로 도플갱어가 되어 증식한다. 부잣집 사모님과 똑같이 생긴 포르노 배우(<침실의 표적>), 죽은 아내와 흡사한 여자(<옵세션>), 머리색만 다른 두 여인(<팜므파탈>), 제거 대상이 된 여자와 닮아 대신 살해당하는 여자들(<필사의 추적>). 이 여자 도플갱어들은 남자의 마음을 혼란시키고 집착을 부른다. 남자뿐 아니라 영화 전체를 혼돈으로 끌어당긴다.

마이클 만

마이클 만은 가장 순결한 남자영화를 만든다. 그의 남자들은 드 팔마의 남자들처럼 여자 뒤를 쫓아다니며 그녀가 버린 팬티를 주머니에 넣는 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남자의 일’과 ‘남자들만의 뜨거운 세계’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혼자다. 가정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가정은 남자의 일에 거치적거리므로, 아내는 남자들의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외로운 늑대가 되어 고독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숙명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인다. 목숨을 걸고 여자를 지킨 뒤, 떠나보내야 할 때가 되면 말없이 보낸다. 언제나 멋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여자는 남자의 로망과 고독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다. 당당함과 멋진 몸매(더하기 섹스신)로 보는 이를 즐겁게 해주지만 행위의 주체는 대체로 남성이다. 물론 ‘그’ 앞에서만은 연약한 여자가 된다. 그는 보통 남자가 아니니까, 그는 특별하니까.

<마이애미 바이스>

섹스는 여자와 하지만(당연하지. 마초와 동성애는 상극이니까) 정신적인 사랑은 남자들끼리 나눈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진짜 관계’를 맺을 자격은 남자들만이 갖는다. 필생의 짝인 ‘두 남자’는 마이클 만 영화에 항상 등장하는 요소다. 이들은 때로 동료가 되고 때로는 적이 된다. 동료라면 말없는 신뢰를 주고받고, 적이라면 서로의 걸출함을 한눈에 알아 자신에게 걸맞은 상대로 인식한다. 드 팔마의 도플갱어들이 복제된 쌍둥이 같은 느낌이라면, 마이클 만의 짝패들은 한 남자의 분열된 빛과 그림자처럼 보인다. 냉혈한 악당과 정직한 택시 기사(<콜래트럴>), 다혈질 형사와 진중한 형사(<마이애미 바이스>), 천재 갱스터 두목와 천재 형사(<히트>).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지 서로를 설명해주고 돋보이게 한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있을까 하는 건 물론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대다수의 남자들이 마이클 만의 남자들을 보면서 피워본 적도 없는 자신의 로망을 만족시킨다는 사실이다.

관계

브라이언 드 팔마

브라이언 드 팔마의 관계는 순환하는 원이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훔쳐본다. 남자는 눈을 통해 성적 환상을 얻고, 여자는 상상을 통해 겁탈당한다. 그러나 포식자가 과연 남자였을까. 여자를 관음하는 동안 남자는 그녀에게 빠져든다. 자신도 모르게 희생당한 여자는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자를 유혹하고 옭아맨다. 먹고 먹히는 관계. 그 속에 죽이려는 자와 잡으려는 자가 끼어들어 쫓고 쫓기는 관계가 시작된다. <드레스트 투 킬>의 케이트는 정신과 의사 앨리엇을 유혹한다. 유혹당한 앨리엇은 자신의 다른 인격인 바비로 하여금 케이트를 살해케 한다. 리즈는 이를 목격하고, 목격당한 바비는 리즈를 추격한다. 자신을 쫓는 바비를 리즈는 역추적한다. 리즈는 바비를 찾으려 앨리엇을 유혹하고, 유혹당한 앨리엇은 다시 바비를 부른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살해당한 케이트의 아들이 지켜본다.

드 팔마가 자주 사용하는 화면분할은 물고 물리는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화면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연관된 행동을 한다. 이들은 긴밀하게 물려 있으면서 함께 있지 않으며, 서로 떨어져 있지만 연결되어 있다.

<블랙 달리아>

순환하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만이 아니다. 30편에 달하는 그의 영화들도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간다. 주지하다시피 관음증과 이중인격 그리고 살해의 모티브는 히치콕에게서 왔다. 그러나 다만 시작이 히치콕이었을 뿐이다. 이 이미지들을 수없이 반복하는 동안, 드 팔마는 경배의 대상을 히치콕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바꿔놓았다. <시스터스>-<옵세션>-<캐리>-<드레스트 투 킬>-<필사의 추적>-<침실의 표적>으로 이어지는 라인, <스카페이스>-<언터처블>-<칼리토>로 이어지는 또 다른 라인. 그들은 서로를 복제하고 몸을 섞으며 스스로를 재창조한다. 최근작 <팜므파탈>(2002)과 <블랙 달리아>(2006)는 이들의 진보한 결과물인 동시에, 근원으로 회귀하는 드 팔마의 몸짓이다. 그의 여자들은 <팜므파탈>의 로라를 통해 귀환했다. 그러나 더이상 수동적 관음의 대상이 아닌, 스스로 관음을 유발하고 이용하는 능동적 주체, 심지어 관음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도 있는 강한 인물로 진보했다.

마이클 만

마이클 만의 관계는 직진하는 평행선이다. 이곳저곳 기웃거리거나 배회할 틈 없이 정해진 종착지를 향해 주야장천 달린다. 그 종착지는 언제나 최후의 결전이다. 대규모 총격전이 일어날 때도 있고(<마이애미 바이스> <히트>),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 일대일 대결이 펼쳐지거나(<콜래트럴>), 사회 정의를 바꿀 심판이 기다린다(<인사이더>). 그 결전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 주인공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서로 손을 잡지 않는다. 그저 서로 바라보며 나란히 달릴 뿐이다. 화면 가득히 인물을 클로즈업하는 감독의 습성은 이 남자의 내면에 다른 사람은 들어올 수 없음을 역설한다.

도시, 섹스, 폭력

브라이언 드 팔마

드 팔마의 도시는 돌길 위에 옛 건물이 오밀조밀 모인 오래된 도시다. 비정형의 도시는 스스로 자라난 유기체와 같이 많은 틈과 그림자를 품고 있다. 외곽으로 걸음을 옮기면 어두운 숲도 있다. 그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훔쳐보고, 누군가가 따라오고, 누군가가 살해당한다. 은밀하고 폐쇄적인 공간. 농밀하고 에로틱한 공간이다.

관음을 포함하여, 드 팔마의 영화에서 섹스는 영화 그 자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위험하면서도 짜릿한 것. 뱀파이어의 키스처럼 언제나 피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여자들은 남자의 시선에 성적으로 노출되는 동시에, 살인자의 눈에도 노출된다. 섹스가 일대일의 접촉인 것과 마찬가지로, 폭력도 밀착된 상태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다. 살인자들은 표적에게 소리없이 다가와 정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살인을 행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총보다 훨씬 촉각적인 도구가 필요하다. 면도칼이나 목을 조를 수 있는 쇠줄, 때로는 슬레셔영화에 어울릴 법한 드릴이나 톱이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슬레셔의 전형과는 여러 걸음 떨어져 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행위처럼 이유없는 대량 학살은 일어나지 않는다. 살인자의 눈은 불특정 다수가 아닌 ‘나’를 향해 있다. 그는 비정상이지만 영리하며 내게 집착한다. 내가 죽지 않으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마이클 만

마이클 만 영화의 배경은 언제나 거대한 도시다. 거대한 빌딩, 거대한 도로, 거대한 다리. 드 팔마의 옛 도시가 가진 정교하고 치밀한 그림자 대신,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운 커다란 어둠이 도시를 툭툭 잘라놓는다. 처음부터 도시의 야경으로 시작하는 <마이애미 바이스>는 대도시의 어둠이란 것이 도시 전체에 드리워져 있는 존재임을 웅변하는 듯하다. <콜래트럴> 빈센트(톰 크루즈)의 말처럼, 도시는, 전철 한구석에서 누가 죽어도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사람들의 꿈을 소비하되 절대 실현시켜주지 않는, 비정하고 냉정한 탈인격의 공간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언제 죽을 지 알 수 없다. 운이 좋으면 살고 운이 나쁘면 죽고, 그뿐이다.

<콜래트럴>

그래서 개인의 생활은 중요치 않다. 마이클 만의 관심은 도시에서 일어나는 대규모 범죄다. 천문학적 단위의 돈과 마약이 오가고, 중대한 사건의 관계자들이 청부업자에게 위협받는다. 인격을 거세한 기관총이 작렬하는 곳에서 면도칼 따위는 사용할 수도 없는 멍청한 물건이다.

사랑하는 남녀의 섹스는 지친 몸을 누이는 쉼터처럼 보이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일 뿐. 남자들은 바지를 끌어올리기 무섭게 전쟁터로 돌아간다. 마이클 만이 특히 좋아하는 나이트클럽 신에서 군중과 스트립댄서의 관능적인 춤을 볼 수 있지만, 도시의 부속물처럼 보이는 이 광경은 외려 무성적이다. 마이클 만 영화에 은밀히 훔쳐볼 여자는 없다. 다만 2시간 풀 가동으로 당신의 관음증을 충족시켜주는, 뜨거운 남자가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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