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불완전한 기억을 다룬 영화들 [1]
2006-10-17
글 : 장미

내 이름은 레너드 쉘비. 단기기억상실증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뒤 온갖 불행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잠깐이면 까무룩히 정신을 잃는 이 병 때문에 생각만큼 쉽진 않지만 말이다.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과정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난 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중에는 기억의 불완전함으로 고통받는 사람 역시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그들의 증상을 수집하고 분석하는 데 자연스레 관심을 기울이기 됐다. 각각의 경우에 번호를 붙인 다음 병명에 대해 짧게 기술하는 노트도 하나 마련했다. 아내를 찾는 와중에도 이런 작업에 신경을 쏟은 이유는 그들이 내 증상의 정도를 가늠할 일종의 좌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기억으로 고통받는 이들과 그들의 증상을 집요하게 추적해나갔다.

이렇게 이 노트가 탄생했다. 사실 노트의 공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나를 포함해 100여명의 정보를 담은 이 물건은 내게 삶의 의미나 다름없는 귀중한 보물이다. 하지만 내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지금, 동병상련의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이 노트를 풀어놓고 싶다. 힘든 결정을 내린 나의 용기에 자축의 박수를. 자, 이제 노트를 펼치겠다. 내가 여러분께 소개하려는 사람들은 기억 장애 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증상을 지닌 이들이다. 다시 망각의 세계로 빠져들기 전 재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아, 뒤에 이들 중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내 사연을 주워들은 인연을 끈으로 안부인사 한마디 전해주길 바란다. 혹시 날 기억 못한다면 원래 그런 치들이니 넓은 아량으로 이해하시라. 원래 기억이란 그렇게 불완전한 놈이 아니겠는가.

사례 1: 나, 레너드 쉘비

이 노트에 나를 포함시킨 것은 무엇보다 내 증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해 현재 상태를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싶어서였다. 한편으론 나야말로 기억의 고장으로 인한 불행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예가 될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전직 보험수사관이었던 나는 현재 아내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중이며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과도한 충격으로 단기기억상실증에 시달리고 있다. 특별한 외상은 없지만 10분 전의 일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심각하다면 심각한 상태다. 기억상실증은 신체적인 외상을 계기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나처럼 오로지 정신적인 충격에 의해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짧은 기억을 보완하기 위해 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문신을 적극 활용한다. 살인범 추적에 있어 정확한 사실의 숙지는 무척 중요하며 무엇보다 악당들이 흘리고 다니는 거짓 정보를 피하려면 나 스스로 믿을 만한 정보를 모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문신이냐. 우선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휴대하기 좋은 뿐 아니라 사용도 간편하다. 몇분만 기다리면 완성된 사진을 찾을 수 있기에 나처럼 기억할 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문신으로 몸에 새겨넣는다. 과정이야 더없이 고통스럽지만 한번 하면 그 뒤론 절대 잊을 수 없다는 점에서 문신은 가장 확실한 메모나 마찬가지다.

내 증상은 의학적인 방법으론 치료가 불가능하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지만 뇌의 신비를 면밀히 밝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신적인 동반자를 얻는다면 보통 사람처럼 생활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게 된 건 루시 휘트모어(사례13)라는 운 좋은 사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처럼 단기기억상실증 환자였지만 헨리 로스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삶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 기억상실증을 앓고 있는 혹은 앓은 바 있는 루시 휘트모어(사례13), 제이슨 본(사례83)의 증상을 참고할 것. 동물의 사례를 연구하려면 단기기억상실증이라 의심할 만한 극심한 건망증에 시달리는 물고기 도리(<니모를 찾아서>, 사례2)를 참고할 것.

<메멘토>는 어떤 영화?

선댄스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미스터리스릴러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피드백 구성과 탄탄한 시나리오, 충격적인 결말이 잘 어우러져 호평을 받았다. 아내가 살해된 뒤 레너드 쉘비(가이 피어스)는 범인이라고 생각되는 존 G를 찾아나선다. 사건의 단서를 쥐고 있는 이들은 나탈리(캐리 앤 모스)와 테디(조 판톨리아노). 중요한 정보를 서슴없이 전달하는 나탈리나 그녀를 믿지 말라고 경고하는 테디나 어딘가 의심스럽긴 매한가지다. 만나는 사람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어 기록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몸에 문신까지 남기지만 레너드의 추적은 점차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사례11: 앨런 해크먼

앨런 해크먼은 슬픈 눈을 지닌 중년 남자다. 나는 그를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떠도는 공원의 한 귀퉁이에서 만났다. 한때 다른 사람의 기억을 편집하는 ‘커터’라는 직업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능숙한 일처리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앨런은 어릴 적 루이스 헌트라는 소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루이스 헌트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 그는 자신이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해크먼의 증상은 극심한 죄책감으로 인한 일종의 착각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를 기억하기 때문에 감각 기관의 특성이나 오류 등 주변의 여러 요소에 따라 어떤 상황을 진실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해크먼이 루이스 헌트의 피라고 여겼던 것은 실상 붉은색 페인트였고 그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 애의 심장이 건강하게 뛰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린 해크먼은 루이스의 사고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 여겼던 까닭에 주변 상황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다소 금욕적이고 소심한 그의 성격은 그가 자신의 세계 속에 틀어박혀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데 큰 몫을 했을 것이다. 사실 해크먼은 아무런 외상이 없는 탓에 치료가 쉬운 사례였다. 자신의 기억이 착각이었고 루이스 헌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부터 해크먼은 곧바로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 해크먼은 커터라는 전직을 이용해 루시 휘트모어(사례13)의 비디오테이프를 편집하는 일을 맡을 수 있었다. 내 소개로 이 일을 얻은 덕에 한턱 단단히 쏘기로 했는데 여태껏 소식이 없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된다.

<파이널 컷>은 어떤 영화?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머릿속에 조이 유기체를 지닌 채 생활하고 있다. 조이 유기체란 사람의 기억을 저장하는 일종의 기억 저장 창고. 앨런 해크먼(로빈 윌리엄스)은 바로 그 유기체를 꺼내 편집하는 커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조이 유기체를 다루는 일은 커터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지만 커터들은 죽은 사람의 사생활을 낱낱이 목격해야 하기에 때론 극심한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명망있는 커터인 해크먼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편집하던 중 어릴 적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루이스 헌트라는 인물을 발견하고 추적에 나선다.

사례13: 루시 휘트모어

루시 휘트모어는 인터넷 동호회 기억의심클럽 회장이다. 동호회 회원들의 성격상 모임을 자주 갖긴 어렵지만 어쩌다 한번씩 정모에 참가하면 그녀는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나를 반갑게 맞이하곤 했다. 루시는 아침마다 비디오를 본다. 그녀는 단기기억상실증 환자로 기억력이 하루 이상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매일 비디오를 보며 자신의 삶을 확인해야 한다. 그녀의 기억상실증은 교통사고로 인한 뇌 손상에서 비롯됐다. 뇌는 일단 손상되고 나면 다시 재생시키는 것이 어려운 신체 부위이고 그래서 치료 역시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사실 기억이 고장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절망에 빠진 채 의미없는 나날을 보낸다. 이 쓸쓸한 사실은 평생 착각 속에 빠져 살다 홀로 황혼을 맞이하고만 앨런 해크먼(사례11)만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비루하고 힘들지라도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갈 이만 있다면 힘이 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루시는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사람이다. 헨리 로스란 어수룩하지만 착한 남자가 언제나 그녀와 함께였기 때문이다. 헨리는 루시를 끔찍하게 아꼈다. 비디오로 일상을 기록하는 것 역시 로맨틱한 방법으로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헨리가 고안해낸 방법 중 하나였다. 기억상실증을 극복해 결혼에 이르고 아이를 낳기까지 헨리는 매일 그녀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랑을 고백해왔다. 루시는 헨리가 사랑의 위력을 증명한 완벽한 남자이자 애인, 남편이라고 귀띔했다.

※ 성격이 쾌활하고 활발한 루시는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에도 곧잘 앞장서곤 했다. 혹여나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분이라면 루시에게 문의하라. 큰 도움을 받을 거다.

<첫 키스만 50번째>는 어떤 영화?

수의사 헨리 로스(애덤 샌들러)는 하와이로 휴가 온 여성들을 침대로 끌어들이는데 일가견이 있는 마력의 소유자다. 수많은 여자들을 전전하던 어느 날 그는 레스토랑에서 루시 휘트모어(드룬 배리모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교통사고로 인해 뇌를 다친 루시가 그를 하루 이상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기억상실증으로 인한 난관, 루시의 아버지와 남동생의 협박에도 헨리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쉽게 포기할 수 없다. 하룻밤 로맨스와 달콤한 첫 키스가 이어지고 마침내 함께 밤을 보내는 데 성공한 그들. 해피엔딩이 가까운 듯 하건만 난관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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