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영화를 안 보다가 일주일새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귀향>과 켄 로치 감독의 <보리밭에 부는 바람> 두편을 연거푸 봤다. 평소 ‘거장’으로 알려진 감독들답게 두 영화 모두 ‘베리굿’이었다. 지금까지 나는 두 감독을 동시에 떠올려본 적이 없다. 건조하고 진지한 켄 로치와 야하고 따뜻한 알모도바르는 착한 학교 선생과 유능한 바텐더만큼의 거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두 영화를 나란히 본 탓인지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 같은 걸 느꼈다. 그건 바로 말하는 방식의 유사성인데, 나는 이게 ‘거장의 화법’이 아닐까 싶다.
먼저 켄 로치의 화법. 그는 영화 포스터에 ‘왼쪽에 서서 세상을 보는 시네아스트’라고 소개돼 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그는 ‘왼쪽에 남아서 사람을 응시하는 사람’이다. 이 차이는 이런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왼쪽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세상이 오른쪽으로 기울고, 기운 만큼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몰려갔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서 왼쪽에 서게 됐다. 그는 그 자리에서 세상에 휘둘리는 인간을 계속 응시한다. 그의 시야에는 오른쪽으로 기운 세상이 그대로 포착되지만 시선의 초점은 여전히 인간에 맞춰져 있다. 바로 옆에서 총성과 욕설이 난무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동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을 공격하지 않고 인간을 오래 쳐다본다. <보리밭에 부는 바람>에서 그의 시선은 배신자로 낙인찍혀 처형당하는 무구한 소년, 그 소년을 처형한 청년, 다시 그 청년을 처형하는 청년의 형으로 이어지는 폭력의 전이과정에 고정돼 있다. 대의명분에 의지해 저질러진 폭력의 사슬이 삶을 파괴하는 과정을 그는 폭풍에 쓰러지는 보리를 지켜보는 농부의 마음으로 그리고 있다.
알모도바르는 여자 편에 남은 남자다. 온 세상이 남자쪽으로 몰려가 있을 때 반대편에서 지겹도록 자궁을 찬미한다. 그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별로 없다. 남자들을 귀찮다는 듯이 영화에서 삭제해버린다. <귀향>에서 남자들은 여자 손에 불타죽거나 칼 맞아 죽는다. 이렇게 여자들만 남은 자리에서 그는 인체의 3분의 1이 지방인 여성의 육체가 발휘하는 놀라운 포용력과 생명력을 찬미한다. 멀리 있는 큰 적을 공격하지 않고 가까이 있는 인간을 찬양하는 알모도바르의 전략은 그 자체가 여성적이다. 그러니 이 두 감독의 화법에 내재된 확신은 이런 게 아닐까? 인간의 선의는 대의명분을 매개해서 개인에게 배달되는 법이 절대로 없다!
벤야민은 험담과 뒷공론이 모든 현상 중에서 가장 소시민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소시민이 험담과 뒷공론을 일삼는 것은 오해받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자기 보존의 불안이 남을 뒷전에서 선제공격하는 것이라면 대의명분에 기대어 공격하는 것은 자기보존의 불안이 집단화된 것에 다름 아니다. 종종 거장의 화법을 가장하기도 하는 집단화된 소시민적 현상이란 이런 게 아닐까?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도덕은 있으나 무엇을 하고 싶은지 꿈이 없는 개인. 그들은 그것이 처음부터 미수에 그친 기회주의의 전략이란 걸 모른다. 무엇을 반대해야 하는지 알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정치, 그들은 그게 처음부터 보신주의에 영점 잡힌 권력이란 걸 모른다. 누구를 비판해야 하는지 알지만 누구를 위해 비판해야 하는지 모르는 지식, 그들은 그게 처음부터 다만 자신의 존재증명을 위한 위선이란 걸 모른다. 무엇을 표현해야 하는지 알지만 누구의 자리에서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예술, 그들은 그게 처음부터 자신의 조악한 의도를 숨기려는 사기임을 모른다. 가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지만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는 것! 그건 무지일까? 간지(奸智)일까? 양자택일하라면 아무래도 간지 같다. 무임승차라는 사태의 핵심을 끝까지 들키지 않으면서 목적지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지고지순한 잔머리 말이다. 소시민적 화법의 요체가 타인 혹은 자신에게 복잡하게 거짓말 하는 것이라면 거장의 화법은 단순한 진실을 자기 자신에게 집요하게 들려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