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황혼의 사무라이> 마지막 사무라이의 생활 발견
2007-02-0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야마다 요지, 마지막 사무라이의 생활을 발견하다

1899년에 니토베 이나조는 “무사(사무라이)는 온 국민의 아름다운 이상이었다. ‘꽃은 벚꽃, 사람은 무사’라는 말이 널리 퍼져 있을 정도였다. 인간의 삶에 대한 본연의 자세, 사고방식 등 무엇 하나 무사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은 게 없었다”며 <무사도>(한국어판 제목 <일본의 무사도>)에서 서양인들을 향해 썼다. 사무라이는 일본적 정신세계를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대표적인 열쇠말이다. 그 말 속에 ‘섬기는 자’라는 뜻을 갖춘 사무라이, 그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이 당연히 많았고 지금도 많다. 주군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마치고 할복하여 죽은 16세기 47인의 충신에 관한 이야기는 그들의 충과 의를 대변하는 명예율에 관한 오래된 서사가 되었고, 미조구치 겐지는 그걸 장중하게 담았다. 혹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많은 영화에서 도시로 미후네의 건장한 얼굴과 육체, 웅장한 목소리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삐딱한 방식으로 현현되는 사무라이의 대표였다. 대체로 영화 속 사무라이는 고바야시 마사키의 <할복>에서처럼 자주 비장했다. 외부인들에게도 사무라이라는 존재는 숭상과 경외의 대상이었는데, 할리우드가 <라스트 사무라이>로 신화적 존경을 드러냈다면, 그보다 전에 짐 자무시는 <고스트 독>에서 사무라이의 도에 관해 명상하였고, 그보다 더 오래전에 장 피에르 멜빌은 <사무라이>라는 제목으로 죽음 같은 삶 속의 인간 고독을 얼음같이 차갑게 그렸다.

<황혼의 사무라이>의 야마다 요지는 다소 다른 사무라이의 정의와 모습에 관심있어한다. 많은 사무라이에 관한 영화가 그들의 칼이 어떻게 우는지 마침내 그 칼이 피를 불러 어떤 명예와 충의가 지켜지는지 혹은 망쳐지는지에 대해서 긍정하거나 비판하는 것이라면, 야마다 요지는 칼을 쓰지 않을 때 그들이 어떻게 생활하는지 혹은 어떻게 원하지 않는데도 칼을 쓸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신화적 인물과 영웅적 태도로 등치되는 칼의 삶 이외에 그 어떤 구질구질한 역경이 있는지 상상하고 싶어한다. 그는 “사무라이가 아침에 일어나서 어떻게 세수하는지, 뭘 먹고, 뭘 입는지 하는 그런 것들. 사무라이의 진짜 생활을 그리고 싶었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가족’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내가 만들었던 영화 시리즈) <남자는 괴로워>와 통하고 있다”고 이 영화를 들고 2003년 한국의 어느 국제영화제에 왔을 때 말한 적이 있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2003년 일본 아카데미 12개 부문에서 수상했고, 이후 나머지 두편의 시대극영화 <숨은 검>, <무사의 체통>으로 이어지며 3부작으로 완성됐다.

봉건시대의 마지막을 따라 그 시대에 속한 사무라이들도 사라졌다. <황혼의 사무라이>의 주인공 이구치 세이베이(사나다 히로유키)는 메이지 유신이 오기 직전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그들 사무라이 중 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는데 죽었고, 어머니가 있지만 치매에 걸렸다. 어린 두딸은 아직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만한 나이가 아니다. 두딸 중 한명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버지 이구치의 삶에 관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주군의 창고지기로 일하지만 해질녘만 되면 어김없이 집을 향해 가는 이 가정적인 사내를 향해 동료들은 “황혼의 세이베이”라고 놀린다. 놀림을 받고 나서 집으로 간 그가 하는 건 적은 녹봉으로 감당하기 힘든 집안의 가계를 위해 밭을 갈고 나무를 패는 여분의 노동이다. 이 사무라이는 둔탁한 칼로 나무젓가락을 만들고 싸움이 붙어도 진검 대신 나무몽둥이를 든다. 유년 시절 좋아했던 친구의 여동생 토모에(미야자와 리에)가 술버릇 고약한 남편의 손찌검을 피해 이혼한 뒤 친정에 오고, 그 남편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걸 우연히 가로막다 결투신청을 받아 싸울 때에도 이구치는 진검을 들고 덤비는 상대를 끝까지 몽둥이로 제압한다. 그는 사람을 죽이기 쉬운 칼을 먼저 쥐지 않는다.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람을 해하는 것이 목적인 사무라이에게 살기란 무엇보다 필요한 본능인데, 이미 피로한 삶과 대적하다 지쳐 있는 그는 자신에게 그런 살기가 없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사무라이 이구치는 단 한번 진검을 들고 단 한 사람을 죽인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주군의 강압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여 그 명령을 실행한다. 어떤 주군의 마지막을 따라 끝까지 버티던 당대의 무사 요고를 참수하는 것이 이구치의 임무다. 영화는 후반부 근 20분간 좁은 집안에서의 둘의 묘한 대치를 보여준다. 묘한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누구보다 이구치는 지금 당장 죽여야 할 상대와 가장 오랜 시간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폐병으로 죽은 요고의 아내와 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구치는 자기와 나머지 가족을 떠올린다. 그들의 대화 속에서 적장인 요고는 “사무라이의 시대는 끝났어”라고 읊조린다. 그리고 나중에 이구치는 딸에게 “칼의 시대는 끝난 것 같다”라고 비슷하게 말한다.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들은 사라지는 것들을 대신하는 이름이다. 곧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황혼의 사무라이>에는 세개의 중요한 죽음이 있다. 그 세개의 죽음이 상징이나 알레고리와 같은 의미의 수사학으로 쓰이지는 않지만, 이구치라는 사무라이의 삶을 결정짓는 서사적 요체로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는 아내의 죽음을 맞는다. 아내가 없는 그는 가난하고도 외로운 홀아비에 불과하다. 영화가 정점에 이르면 그는 두 번째 죽음, 즉 적장의 죽음을 가져와야 할 역할을 맡는다. 거기에서 그는 자신의 삶과 계급의 운명을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날 즈음 딸은 또 하나 누군가의 죽음을 전한다. 그러나 영화는 세개의 죽음 중 가장 중요한 이 마지막 죽음에 대해 영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 찰나의 덧없는 소멸이 격변의 시대 안에 살던 하급 인생들의 삶을 더 쓸쓸하게 보이도록 만든다.

할복의 사무라이가 아닌 사무라이라는 계급 중에서도 하급에 속하는, 그 누군가의 아들이자 어떤 아버지이자 어떤 남편이었던 한 인간에 대해서 이 영화는 그린다. <황혼의 사무라이>가 비록 사무라이를 그린 영화의 대표작이 되긴 힘들다 해도 혹은 걸작의 풍모로는 부족하다고 해도 혹은 심오한 철학과 영화적 형식은 없다 해도 물 흐르듯 착실하게 그려진 장인의 수작인 것은 사실이다. 야마다 요지는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사무라이를 도의 차원이 아닌 생의 차원으로 끌어내린다. 야마다 요지가 48편으로 완성했던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가 끝난 이유는 주인공 토라상을 맡았던 배우 아쓰미 기요시가 실제 암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생이 끝난 순간 그 영화도 끝났다. <황혼의 사무라이>는 지금은 없는 한 사무라이의 생을 담담하게 회고한다. 그것이 딸의 목소리를 빌리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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