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투박한 수제품 같은 느낌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2007-09-12
글 : 이영진
17년 만에 내놓은 노(老) 감독의 영화 혹은 진실

여고생 지혜(박하선)는 뉴타운 건설로 곧 폭파될 지역에 한 남자가 침입했다는 뉴스를 접한다. CCTV 화면에 얼굴이 잡힌 이 엉뚱한 사내는 다름 아닌 노(老)작가 최호(하명중)다. 자신이 끔찍이 따르는 할아버지 최호가 폭파 직전의 철거지구에 들어갔음을 알게 된 지혜는 시험 도중 학교를 뛰쳐나간다. 첫사랑을 만나러 간다며 문자메시지까지 보내서 자랑하던 할아버지는 무슨 까닭으로 세상에서 곧 자취를 감출 동네에 흘러든 것일까. 아니, 할아버지가 고이 안고 있던 자그마한 보따리, 그 안에는 도대체 무슨 귀중품이 든 것일까. 최호는 그러나 손녀의 다급하고 애타는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라진 어머니의 체취를 뒤쫓고, 맥박을 느끼기에도 바쁘다. 자식 셋을 키웠으나 홀로 남았던 어머니의 한숨은 얼마나 깊었을까. 늙은 아들이 허물어진 벽을 쓰다듬으며 뒤늦은 후회를 들이마시는 동안 영화는 아직 식지 않은 어머니(한혜숙)의 온기를 과거로부터 조금씩 호출한다.

최인호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소설의 후속편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로움의 독방에 어머니를 감금시킨 건 바로 몰인정한 자신”이라는 소설 속 1인칭 화자의 고백에 덧붙여 영화는 환상의 오디세이를 통해 어머니와 재회한 아들이 한 여자를 향해 ‘어머니’라고 부르기까지의 안간힘을 묘사한다. 밀전병을 만드느라 기름이 잔뜩 묻은 앞치마, 자식들 용돈을 주기 위해 싹둑 자른 긴 머리, 차마 전해지지 못한 수백여통의 편지 등 영화는 특별한 극적 사건을 내놓는 대신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조각들로 30년 넘게 등지고 살아온 모자(母子)의 심리를 꿰맞춘다. <화분> <최후의 증인> 등에 출연하며 1970년대 대표배우로 자리했고, 1980년대에는 <땡볕> <태> 등을 내놓으며 감독으로서도 주목받았던 하명중 감독이 <혼자도는 바람개비>(1990) 이후 17년 만에 내놓은 재기작. 30년 넘는 세월을 얼굴에 촘촘히 새기는 한혜숙의 연기는 더없이 능숙하고, 하명중 감독의 친아들이기에 캐릭터 사이의 친연성이 더 두드러져 보이는 하상원의 연기는 꾸밈없이 담백하다. 순제작비 15억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세련된 구조와 매끈한 리듬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한컷 한컷 진심으로 따올린 투박한 수제품 같은 느낌의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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