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윤도현] “음악의 본질은 마음 터치”
2009-04-16
글 : 문석
사진 : 이혜정
8집 앨범 <<共存>> 낸 YB밴드 리더 윤도현

“바쁜 게 좋은 거죠.” 충혈된 눈으로 윤도현이 말했다. 그가 속한 밴드 YB는 얼마 전 8집 음반 <<共存>>을 발표했고, 4월14일부터는 소극장 공연을 시작할 터. 그의 불그스레한 흰자위는 YB의 멤버들이 음악을 알리기 위해 얼마나 빡빡한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는지를 드러낸다. 그가 출연한 프로그램 중에는 <이하나의 페퍼민트>도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가 진행하던 <윤도현의 러브레터>의 후신 말이다. “러브레터는 러브레터고 페퍼민트는 페퍼민트”라고 쿨한 척 말하지만, 사실 윤도현은 그 프로그램에 대한 그리움을 8집에 실린 <편지>라는 서정적인 노래를 통해 토로한다.

물론 YB를 대표하는 단어는 ‘서정성’보다는 ‘사회성’ 혹은 ‘전투성’이다. 3년 만에 발표한 앨범 <<共存>>은 유난히 사회적 메시지를 품은 노래가 많다. 젊은 세대들의 현실을 드러내는 <88만원의 Losing Game>, ‘맞서 싸워 두 주먹 쥐고 깃발 들어’ 같은 가사가 80년대 투쟁가요를 연상케 하는 <깃발>, 성적 때문에 자살한 초등학생을 애도하는 <물고기와 자전거>, ‘미쳤어 거짓 소문에 다 미쳐버렸어/ 밟았어 썩은 글들로 다 밟아버렸어’처럼 직설적인 가사로 악플 문화를 비판하는 <Talk To Me> 등은 현실에 대한 그와 YB의 ‘분노 게이지’가 꽤 높이 치솟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상하다. 전반적인 분위기는 전투적인데, 신영복 선생의 필체로 적힌 음반의 제목은 ‘공존’이니 말이다.

- 앨범 타이틀이 ‘공존’(共存)이다.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것 같다.
= 애초의 제목은 첫곡인 <Millimicron Bomb>이었다. 굳이 해석하면 ‘1000분의 1 마이크론 폭탄’이 되겠지만, 지을 때는 ‘1000분의 1’ 따로 ‘폭탄’ 따로였다. 사람들이 이 앨범을 살 확률은 1000분의 1 마이크론인데, 듣고 나면 폭탄 맞은 기분이 될 것이다, 뭐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완성해놓고 보니 전혀 폭탄이 아니더라. (웃음) 대중적인 고려도 많이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존’이 어울리겠더라.

- 가사가 더 적나라해진 느낌인데 ‘공존’이라는 말을 쓰니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힘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땅 위에서 살아야 하는 게 세상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편가르기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좌파, 우파 해가면서 정치적 견해로 나누고 이견이 생기면 상대방을 매도하고. 그런 것을 비판하면서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붙이려 했다.

- 공존이라는 것도 어떤 원칙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공존이라고 해서 우유부단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자는 이야기도 아닌 것 같고. 하여튼 우리는 음악이란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설사 우리 배가 부르더라도. 나는 실생활에서는 용기가 없지만 음반에서만큼은 소신을 갖고 의견을 당당히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 가장 강한 메시지를 담은 듯 들리는 게 <깃발>이다. 용산참사를 보고 만들었다고 들었다.
= 보도자료에 그렇게 나와 있는데 사실 그 이전에 만들어놓은 곡이다. 처음에는 영화 <트로이>를 보고 저기에 음악을 넣는다면,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곡인데 철거민 문제와 맞물리면서 만들어졌다. 그러다 용산에서 사건이 터졌고 현장에 다녀와 다시 그 노래를 들으니 이상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렇게 완성되긴 했지만 그건 택시 운전사 이야기일 수도 있고, 갑자기 좌절한 어떤 사람 이야기일 수도 있다.

- <물고기와 자전거>는 학업 부담으로 자살한 초등학생의 유서에서 영감을 받아 썼다고 적혀 있다.
= 가사는 베이스 치는 (박)태희 형이 썼는데, 그 노래는 지금도 들으면 찡하다. 아이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 <Talk To Me>는 악플에 대한 이야기일 텐데, 주로 어떤 악플에 시달리나.
= 뭐 여러 가지다. 직접 보면 알 텐데…. 그래도 무플보다는 낫더라. (웃음)

- <88만원의 Losing Game>은 명확히 ‘88만원 세대’에 관한 노래 같다.
= 내가 원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루해하고 잠도 많고. (웃음) 어쩌다 <88만원 세대>를 읽게 됐는데, 경제 이야기니까 전문용어도 많이 나오더라. 그래서 거의 한달 만에 읽었더니 남는 것은 전문용어가 아니라 ‘우리가 희망을 갖기 힘든 시절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어제 류승완 감독과 통화했는데 영화하는 분들도 60%가 실직자가 됐다고 하더라. 그런 데서 느낀 것을 음악으로 담고 싶었다. 대신 정권을 비판하려는 건 아니다. 아까도 말했듯 진짜로 공존하고 싶어서 만든 음악이다. 물론 음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욕심은 버렸지만, 이런 노래로 사람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그들의 마음도 좀 터치하자는 차원이다.

- 음악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언제 버렸나.
= 글쎄, 정확히 언젠지는 모르겠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기지만 처음 음악을 시작할 때 종이연이라는 노래패에 있었다. 사회운동과 관계를 맺다보니 음악 연습보다 신문 사설 읽고 토론하고 그런 일이 많았다. 그런데 그게 또 싫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음악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음악은 정치와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터치하는 것이 본질이라는 생각이 든다.

- 타이틀곡인 <아직도 널>은 상업적 전략을 담은 노래처럼 보인다.
= 꼭 그렇지도 않다. 이건 원래 2005년 유럽투어를 할 때 태희 형이 투어버스 안에서 만든 노래인데, 애초에는 영어가사가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의 노래>라는 제목을 갖게 됐다. 나는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 멜로디에 사랑 노래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직접 가사를 써보겠다고 한 거다. 내가 원래 사랑에 대한 가사를 잘 못 쓴다. 1집에 있는 <사랑 Two> <너를 보내고>나 솔로 앨범에 있는 <사랑했나봐>는 다른 사람이 쓴 가사다. 사실 나는 결혼해서 아이까지 두다 보니 그런 사랑에 대한 가사를 쓰기 어려운 상황 아닌가. 그래서 이번에는 상상임신하듯 상상연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그러다 이 가사를 썼는데 운 좋게 채택이 됐다. 알고 보니 우리 사장님(다음기획 김영준 대표)이 이미 여러 작사가들에게 가사를 맡겨놓은 상태였는데 내가 쓴 게 뽑힌 거다.

- 같은 멜로디인 <엄마의 노래>는 이승엽 선수의 응원가로 채택됐다.
= 고맙게 생각한다. (김)제동이가 앨범을 듣다가 이거다 싶어서 승엽이한테 들려줬단다. 그런데 너무 좋아했다고 하더라.

- 그 노래에는 딸인 이정이의 목소리도 들어 있다.
= 그 노래를 녹음하던 도중 놀러왔다. 그래서 뭐 장난치고 놀다가 엄마가 밖에서 손을 흔드는데 “엄마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게 이상하게 울컥하더라. 그래서 집어넣게 됐다. 집에서는 <노킹 온 헤븐스 도어> 같은 노래를 함께 부르기도 한다. 언제나 음악을 듣고 부르고 기타나 피아노를 치면서 논다.

- 아빠가 가수고 엄마가 뮤지컬 배우이다 보니 자질이 있나 보다.
=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음악 하겠다고 하면 절대 반대하지 않을 거다. 남들은 어릴 때부터 레슨을 시키라고 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집에서 기타를 한번 가르쳐봤는데 1분 만에 팽개치고 나가더라. 무조건 놀게 한 다음에 스스로 배우고 싶어 할 때 가르치려고 한다.

- 이번 앨범을 만드는 과정은 유난히 어려웠다고 들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거의 다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완전히 노래들을 갈아엎었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에 그동안 앨범을 만들면서 놓친 게 많았다고 생각했고, 가진 역량에 비해 음악이 왜소하다는 비판도 많이 들었다. 그런 부담감 때문에 목숨걸고 만들어보자는 각오가 있었다. 그렇게 만들었는데 사장님은 들어보더니 “음악으로서 가치가 없다. 이건 너네들끼리 자위하는 거다”라고 하더라.

- 어떤 음악이었기에.
= 그중에 살아남은 유일한 곡이 <Talk To Me>인데, 그 노래처럼 변박자가 심하거나 사이키델릭하거나 프로그레시브한 노래들이었다. 사실 7집 흥행이 잘 안돼서 부담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해결하는 방식이 프로답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새로 작업하면서 가장 솔직한 자세로 음악을 만들자는 쪽으로 마음을 모았고, 지금의 음악이 만들어졌다. 우리끼리 독불장군식으로 만들었던 게 문제였다. 역시 공존을 해야…. (웃음)

- 이번에는 온갖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음악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예전에도 나갔다. 그래도 <윤도현의 러브레터>를 했으니까 KBS 외에 다른 방송사에 나가는 게 쑥스럽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게 없지 않나. 버라이어티에 나가서도 웃기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썰렁해지더라도, 그래서 편집이 되더라도 음악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방송에 나갈 때 항상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가는 것도 말이 막히면 노래를 하자는 차원이다. 그게 내가 잘하는 거니까. (하지만 인터뷰를 한지 이틀 뒤 YB는 출연이 예정됐던 <1 대 100> <비타민> <열린 음악회>로부터 돌연 출연 불가를 통보받았다. 이들은 모두 KBS의 프로그램이다. 이에 대해 윤도현과 소속사 다음기획은 “공식적으로 할 말은 없다”고 밝혔다.)

- 앨범이 나오기 전 한 포털 사이트에서 제작과정을 보여줬다. 그중 인상적이었던 게 베이시스트 박태희와 드러머 김진원이 다투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다투고 하면서도 밴드가 계속 유지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 밴드를 왜 하는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보면 답이 나온다. 내 경우는 남자 네명이서 같이 돌아다니면서 음악을 하는 게 너무 좋다는 거다. 솔로로 활동하다가 1997년 2집을 내면서 윤도현 밴드를 만들었는데, 혼자 하는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함께 가다보니 정도 들고 서로에게 안쓰러운 감정도 들고 때때로 서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 그 이상의 큰 위기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 2000년에 잠시 해체했던 게 가장 큰 일이었다. 지금이야 형제처럼 지내고 있지만, 당시 기타를 쳤던 (유)병열 형과 불화가 있었다. 성격에서나 음악에서나 정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병열이 형이 나갔는데, 우리는 ‘멤버 교체는 해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 해체했다. 다 흩어져서 고향으로 가고 했다. 나도 파주에 내려가서 개를 키우려고 했다. 그게 4집 <<한국록 다시 부르기>>를 발표한 지 얼마 뒤인데, 희한하게 거기 실린 <너를 보내고>가 뜨기 시작한 거다. 그 와중에 사장님이 파주로 와서 설득을 했다. 얼마를 버티다가 진원이 형, 태희 형과 함께 다시 하기로 한 것이다. 기타리스트 허준은 그때 들어왔다.

- 밴드 이름을 YB로 바꾼 것은 ‘윤도현의 밴드’가 아니라 ‘윤도현도 포함된 밴드’라는 의미가 강한 것 같다.
= 이름을 YB로 한 것은 7집 때부터다. 6집은 타이틀이 ‘YB Stream’일 뿐이다. 이름이 중요했던 것은 밴드다운 모양새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예 다른 이름을 지으려는 생각에 우리끼리 아이디어도 내고 공모도 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그렇게 고민을 하던 차에 유럽투어를 함께했던 스테랑코 멤버들이 ‘YB’가 좋다면서 의미 부여까지 해줬다. ‘Why Be?’, 그러니까 ‘왜 존재하나?’ 같은 의미까지 있다면서.

-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들었는데 8집은 만족하나.
= 만족은 없는 것 같다. 후회를 최소로 줄이려 노력했을 뿐, 만족은 역시 아니다. 그래도 원래 녹음이 끝나면 우리 음악을 잘 안 듣는데 이번에는 희한하게 내가 즐기기도 한다.

- 2005년에는 유럽투어를 다녀왔고, 2007년과 2008년에는 SWSX(South By South West)에 다녀왔다. 스스로도 외국 투어를 ‘맨땅에 헤딩’이라고 표현했는데, 성과가 있나.
= 외국에 나가는 일이 여기서 힘드니까 바람을 쐬거나 충전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외진출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다. 그건 웬만큼 준비가 돼야 쓸 수 있는 말일 테니까. 그저 꿈이 있고 계속 노력하는 중이라고만 하겠다. 하여간 굉장히 좋은 경험임에는 틀림없다. 텍사스에서 열리는 SWSX는 록페스티벌이기도 하고 쇼케이스이기도 한데, 우리도 해외 음악 관계자들 앞에서 40분 동안 공연할 기회를 얻었었다. 특히 첫해에는 운이 좋아서 ‘프레지던츠 오브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 앞에 공연을 했다. 아무래도 유명 밴드니까 많은 사람이 왔고 덕분에 우리 음악을 들려줄 수 있었다. 그 행사 덕분에 우리도 올해 밖에서 뭔가를 하게 될 것 같다.

- 아직도 파주에 사나.
= 아니다. 결혼하면서 뚝섬 근처에서 산다. 파주에는 부모님께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계신다. 지금은 헤이리에 계신데, 음악 활동을 하면서 유일하게 효도한 게 그 집을 지어드린 일이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집을 선물하는 게 오랜 꿈이라 화장실을 4개나 만들었다. (웃음)

- 민감하겠지만, 지난해 11월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물러난 일에 관해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뭔가 석연치 않았기 때문이다.
= 그 얘기는 지금 못하겠다. 그 말은 삼가는 건 당시의 스탭들이 고스란히 남아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 한마디 잘못해서 그분들을 불편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다. 아마도 내가 음악을 관둘 때나 허허 웃으면서 할 수 있겠지.

- 주류 가요계에서 활동하지만, 홍대 앞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인디밴드들과도 여러 가지 교류를 벌이고 있다.
= ‘락스타’(Rock Star)가 그런 거다. 3년 전 어느 날, 후배인 크라잉 넛, 노브레인, 피아, 트랜스픽션, 내 귀에 도청장치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앞으로 친목모임을 갖자고. 서로 힘들 때 위로해주고 끌어주자는 차원이었다. 대낮에 순두붓집에서 소주를 마시면서 모임 이름을 정했는데, ‘락스타’가 좋겠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그렇다기보다는 언젠가 록스타가 될 것이라는 마음을 갖고 만든 거다. 그해 첫 페스티벌을 롤링홀에서 했는데 난리가 났다. 올해도 얼마 전에 갤럭시 익스프레스를 새 멤버를 받아서 공연을 했다. 내년에는 규모를 늘려보려고 한다.

- 그건 인디밴드들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 때문인가.
= 책임감보다는 우리도 외로우니까 그러는 거다. 친구들과 같이 음악을 하고 싶으니까.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개성이 강하다 보니 서로 견제도 하고 하는데 그런 게 트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 이제 방송도 그만뒀으니 공연이 주수입원이 되는 건가.
= 공연은 돈이 안된다. 롤링 스톤스처럼 한번 공연에 5만명씩 들면 돈이 되긴 하겠지만 우리는 웬만하면 적자 보기 일쑤다. 아주 잘되면 좀 남는다. 중요한 생계수단은 행사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했다. 기업이나 단체를 위해서 광대짓을 한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하지 않으면 생활이 안된다. 나야 방송이라도 했지만, 밴드 멤버들은 행사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행사를 그렇게 껄끄럽게 생각하다 보니 어리석은 짓도 했다. 이를테면 신차 발표회장에서 <비싸 보여>를 불렀다. 게다가 경차인데…. 비싸 보인다고 했으니. (웃음) 결국 개런티 반을 환불했다. (웃음) 그런데 이제는 행사에 가도 ‘이분들도 우리를 굉장히 보고 싶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공연을 하러 왔으면 함께 잘 어우러지자는 생각을 한다. 무대 밑으로 내려가서 직원들, 사장님과 돌고돌 때도 있고. (웃음)

- 돈 받는 행사 말고 집회나 투쟁 현장에서도 여전히 공연을 하잖나.
= 우리를 진심으로 원하는데 돈이 없다면 그냥 가서 공연한다. YB는 사회적 약자 혹은 소외된 분들이 문제제기하는 곳에서 공연하는데 익숙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가 평소에는 부르지 못하는 메시지 강한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또 그런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스스로가 그것을 다시 느끼기도 한다.

- 어떤 인터뷰에선가 ‘2010년 월드컵 때는 조용히 지내겠다’고 했다.
= 사실 2002년은 모두 순수했다. 하지만 2006년에는 너도나도 다 나왔고, 그 선봉에 내가 서 있는 게 솔직히 쑥스러웠다. 사실 CF 모델을 뿌리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돈으로 공연도 돌 수 있었고 멤버들도 생활을 했고 회사도 운영을 했다. 그렇게 시작했고 사람들도 원해서 했는데 결론적으로 아슬아슬했다. 사실 내가 안 해도 될 말을 하기도 했다. “월드컵 가수로 불리는 게 싫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건 내가 갑자기 월드컵으로 떴다는 느낌이 싫었던 거다. 그런데 대중은 ‘월드컵이 싫다면서 왜 또 나와서…’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다음 월드컵에 또 나서면 정말 난 매장이다, 매장.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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