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상상력을 이완시키는 마법
2010-08-12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예를 들면 호른이라는 악기가 있다.”
“마유미가 처음으로 쇄골을 으깨놓은 젊은 남자는, 스포일러가 붙은 하얀 닛산 스카이라인을 몰고 있었다.”
“나는 얼음 사나이와 결혼하였다.”
“토니 다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정말 토니 다키타니였다.”

예를 들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작은 이렇다. 툭 안기는 첫 문장의 매력에 가벼운 마음으로 책의 첫 장을 넘긴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하얀 워크 스페이스에 커서가 깜빡거리는 것을 몇분 혹은 몇십 분을 바라보다가 다잡히지 않은 생각들과 떠다니는 아이디어들에 마우스를 내려놓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돈다. 방을 치워보기도 하고 발을 씻어보기도 하고 스탠드의 조도를 낮추고 음악을 틀고 하얀 머그잔에 가루 녹차를 풀어놓아보기도 한다. 의자에 앉은 채로 무릎을 굽혀 발뒤꿈치를 허벅지 앞쪽에 올려놓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가 짧은 글들이 모여 있는 책들에 눈이 간다. 전에 읽었던 하루키의 단편이라 해도 상관없다.

책을 들고 그렇게 단편의 첫 문장만을 읽다가도 첨벙하고 내 시나리오의 첫 문장이 써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의 책을 덮는다. 전에 읽었으니 상관은 없다.

그 단편들을 마음 편히 읽다 보면 내 상상력들이 이완되는 걸 느낀다. 거미원숭이가 찾아오고 어머니같이 생긴 자동응답 전화기와 함께 양갱을 먹는 소설들을 읽다 보면 천장에 둥둥 떠다니던 생각들을 커서에 옮길 용기가 나기 시작한다.

MP3 플레이어에서 무작위로 틀어지는 음악처럼 중간부터 한 장씩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나리오에 대한 생각이라든가 신변에 대한 잡다한 생각이라든가 그 많은 생각을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할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면에선 음악과 닮은 기능이 되었다.

그중 내가 자주 듣는 음악은 “우리는 그 땅을 ‘삼각지대’라고 부르고 있었다”라고 시작한다. 12등분한 치즈케이크 한 조각 같은 모양의 집에서 살며 추위를 이기기 위해 그녀와 그리고 그녀의 고양이와 한 이불에서 자고 공짜 햇빛을 즐기던 그들의 가난을 같이 추억해본다. 가난한 연인들이 서로 한창 이야기를 하다가, 그들의 뾰족한 집 양쪽을 열차들이 한번씩 지날 때마다 잠깐씩 이야기를 멈추는, 그들의 이미지를 상상해본다. 그들의 풍경을 그려보고 따뜻한 녹차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내 하얀 워크 스페이스에 커서를 본다.

신경을 자극하며 깜빡이는 커서를 노려보다가 하루키의 다음 페이지를 넘긴다. 첫 문장을 읽는다.

“강치는 고독했다.”
발가락을 꼬물거리며 다음 문장을 읽기 시작한다.

글 김종관/ 영화감독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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