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판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라고나 할까. <트럭 밑의 삶>은 딸을 잃은 한 여성 ‘노라’의 복수극이다. 그러나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감독은 ‘복수’가 아닌 ‘노라의 일상’에 초점을 맞춘다. 딸의 학교 등록금을 충당하기 위해 밤마다 항구의 트럭운전수들에게 몸을 팔고, 아침마다 딸의 머리를 가지런히 빗겨주며 학교에 보내는 등, 영화의 전반부는 집이 없어 대형트럭 밑에서 임시 거처를 마련해 살아가는 두 모녀의 생활을 묘사하는데 할애한다. 전작인 <오로라>(2009)를 끝내고 차기작을 고심하던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감독이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를 보인 부분이다. 그는 “트럭 밑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 몰랐다”면서 “삶이 힘들더라도 내 집이 생길 거라는 희망을 놓지 않는 태도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필리핀 사회의 풍경과 인물의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감독은 “장르영화의 전형성”을 거부했다.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은 여주인공 노라 역을 맡은 배우 조디 마리아의 연기지도였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만큼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필리핀 최고의 스타 여배우로, 항상 정해진 대로 연기해 온 조디 마리아에게 그는 “대본 없이 즉흥적으로 연기할 것”을 주문했다. 처음에는 배우로부터 원성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스타 조디 마리아’는 ‘트럭 밑에서 사는 노라’가 되었다. 덕분에 영화의 후반부, 노라의 복수는 감정적으로 큰 울림을 준다.
“주변의 일상 모두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것”이라는 평소 지론답게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 감독의 다음 선택 역시 필리핀 사회를 향해 촉수를 뻗는다. “필리핀 여성 감옥 수감자에 관한 이야기”인 <브레사>, “러브호텔 안 풍경을 실험적으로 재구성한” <포르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고 필리핀 숲속에서 사는 일본군을 그린” <해방>으로 무려 세 작품이다. 필리핀 영화계에 새로운 사회파 감독의 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