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밝음과 어둠의 질곡 가득한 삶 속에서 '살아있음'을 보여준다 <핑크>
2011-10-26
글 : 김태훈 (영화평론가)

항구 언저리 선술집 ‘핑크’에 수진(이승연)이 찾아와 같이 일하기로 한다. 주인 옥련(서갑숙)은 아들 상국(박현우)과 함께 10년 넘게 핑크에서 살아왔지만 동네는 곧 철거될 예정이다. 말 못하며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상국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과 마을 안에서 맴돈다. 옥련은 경찰 간부인 경수(이원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철거 반대 시위대를 뒷바라지하며 돕는다. 핑크는 단순한 선술집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삶의 애환을 풀어놓는 곳이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쉼터다. 방랑객(강산에)은 핑크에 종종 들러 노래를 한다. 수진도 깊은 상처를 간직한 채 핑크에 왔다. 어린 시절 그녀는 홀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고 지속적으로 떠오르는 아버지의 환영에 고통스러워한다.

영화 <핑크>를 채우고 있는 것은 선술집 ‘핑크’를 채우고 있는 이러한 삶의 무게들과 우리 삶의 다난한 이야기들만은 아니다. “인물의 정서와 공간의 접점을 가장 신경썼다. 공간이 인물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다”는 전수일 감독의 말처럼 영화에서 공간은 서사만큼 중요한 무게를 가지고 중심축의 역할을 수행한다. 힘들게 찾았다는 촬영지 군산항의 공기와 정서가 그러하고 제목부터 영화의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선술집 핑크의 공간이 그러하고 무엇보다 사각의 프레임을 채우고 있는 미장센과 그 프레임을 만들어내는 카메라와 피사체의 공간이 그러하다. 이러한 미장센은 영화 전체를 아우르고 끌고 가는 힘이며 작품이 말하려는 의도와도 맞닿는다. 영화의 첫 장면은 비가 오는 갯벌에서 시작한다. 지평선과 맞닿은 온통 진회색의 배경 위에 상국이 벌거벗은 맨몸으로 뛰어들어간다. 한참을 질주하던 상국은 지평선 끝자락에서 갯벌이 되며 공중을 맴돌던 갈매기가 된다. 영화에는 이렇듯 공간만을 보여주거나 인물을 잡더라도 공간이 중심이 되거나 인물이 공간 속에 녹아들어 하나가 된 듯한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러한 장면들에서 배경으로 잡히는 공간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하나의 정물이 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서 인간도 자연의 정물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미장센은 ‘되기’, 생성과 맞닿는다. 선술집 핑크 속에서 프레임에 담기는 옥련의 얼굴은 점차 그녀가 바라보는 벽을 닮아가고 벽은 어느덧 옥련이 되어간다. 인물은 공간이 되어가고 공간은 인물이 되어간다. 생존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철거민들의 고통과 사회에서 철저히 외면당하는 정신지체아의 침묵과 근친상간의 늪에서 침몰해가는 수진의 외마디 비명도 핑크가 되어가는 옥련의 얼굴 속에 녹아들어간다. 그녀의 얼굴은 말하지 않아도 시간 속에서의 소멸과 생성 그리고 또 다른 ‘되어감’을 의미하듯 다난한 세상사를 끌어안으며 모든 것을 말한다. 11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서갑숙의 표정은 발군의 힘을 발휘한다.

영화 <핑크>의 공간을 채우는 또 다른 요소는 색감이다. 영화의 제목은 핑크지만 선술집 ‘핑크’의 이름이 핑크는 아니다. 선술집 ‘핑크’의 간판에는 이름이 없다. 간판 색깔이 핑크이고 사람들이 핑크라고 호칭하는 것이다. 제목인 <핑크>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제목 <핑크>가 의미하는 것 중 하나는 이름없는 공간을 채우는 색 그 자체의 중요성이다. 공간은 원래 이름을 갖지 못한다. 이름없는 공간을 나누고 경계 짓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이 바라보는 풍경에서 벗어나려는 감독의 의도는 공간에다 이름 붙이는 대신 그 공간을 색으로 채우는 작업과 맞닿는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색감이 많이 빠져 있으며 퇴색되어 있다. 색감을 중요시한 의도는 영화 전체에 깔려 있으며 마지막 빛 바랜 핑크에서 절정에 이른다. 색감은 질감과 밝고 어둠의 콘트라스트로 이어진다.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것은 콘트라스트 속에서다. 전체가 모두 화이트나 블랙인 화면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듯이 완전한 밝음이나 어둠 속에서는 생명이 존재할 수 없다. 콘트라스트 속에서 생명은 꿈틀거리고 삶의 힘을 이어나간다.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 감독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상실의 테마를 대변하는 듯한 상국과 수진은 비가 오는 갯벌에서, 석양이 가득한 언덕에서 더 이상 풍경이 아니라 정물이 된다. 밝고 어둠의 콘트라스트가 뚜렷한 그 이미지 속에서, 밝음과 어둠의 질곡 가득한 삶의 한가운데에서 영화는 그들의 삶이, 그리고 생명이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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