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한국적 누아르 <신세계>
2013-02-20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누아르라고 불리는 장르가 한국에서 유독 각광받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한국적 누아르의 제작이 시들해진 건 이미 좀 된 일이다. 조폭영화가 전성기를 지나면서 곧이어 한국적 누아르도 함께 유행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신세계>는 좀 특이한 구석이 있다. 당연히 상업성을 지향하면서도 과감할 정도로 창작자의 한 취향을 강조하는 동시에 특정 장르에 관한 매혹을 숨기지 않고 전면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랜만에 출현한 한국적 누아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의 각본가로 이름을 알리고 데뷔작 <혈투>를 연출했던 박훈정 감독 그 자신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이해되는 방법도 함께 가능할 것이다.

전국에 힘을 쓰는 폭력 조직이면서도 정식 기업으로 위장한 골드문 주식회사가 <신세계>의 배경이다. 조직을 이끌던 회장(이경영)이 돌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 자리를 놓고 쟁탈전이 시작된다. 여수 출신의 화교 정청(황정민)과 서울을 근거지로 커온 이중구(박성웅)가 신경전을 벌이는 중에, 경찰은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를 이 조직의 우두머리로 심은 다음 향후 이 조직을 경찰의 지휘권 아래 놓으려는 일명 ‘신세계’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정청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중간 보스 이자성(이정재)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는 이미 경찰에서 오래전에 위장잠입시킨 비밀요원이다. 신세계 프로젝트를 지휘하는 강 형사(최민식)는 이자성을 통해 골드문의 비리를 캐내려고 하지만 이자성은 오래된 위장 수사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 지친 상태다.

<신세계>는 홍콩 누아르의 대미를 장식했던 영화 <무간도> 시리즈를 똑 닮아 있다. 설정이 너무 닮아서 보는 쪽에서 오히려 좀 민망할 정도다. 경찰이지만 범죄자로 위장한 주인공의 이야기야 종종 있겠지만 오랜 시간 그 안에서 생활하다가 스스로의 정체성까지 혼란을 느끼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무간도>의 것으로서 빛났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세계>의 제작진은 이렇게 물으며 시작했던 것 같다. 만약, <무간도>의 인물이 홍콩이 아니라 한국에서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때 갈등은 어떻게 새로운 국면으로 흐를 것이며 주변 인물들은 어떻게 새롭게 창조될 것인가.

이 과정에서 <신세계>가 선택한 방식은 더 많이 참조하는 것이다. 또는 더 많이 상기시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게 영화에 큰 득이 된 것 같진 않다. 가령 사건의 진행은 <흑사회>를, 영화 결말부의 특정 장면은 <대부> 1편의 마지막 장면을 또렷하게 상기시킨다. 영화의 주요한 순간마다 무언가 다른 작품을 참조하거나 상기시킨다는 걸 한 영화의 장점이라고 말하긴 어려운 일이다.

돋보이는 것은 정청이라는 캐릭터다. 처음에는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 복사판이 아닐까 염려했지만 예의 난폭함 뒤편에 깊은 우애를 함께 갖춘 사내로 표현되면서 매력있는 장르적 인물이 됐다. 황정민의 연기가 세심하기도 했지만 캐릭터 자체로도 흥미롭다. 반면 상대적으로 최민식과 이정재가 맡은 두 캐릭터가 돋보이는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다. 장르영화의 매력이 클리셰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클리셰를 변용하고 활용하는 데 있다고 볼 때 <신세계>가 가장 유연하게 만들어낸 것이 있다면 이 정청이라는 인물이다.

전작 <혈투>에 비해 감독의 연출력은 능숙해진 것 같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아이디어 수준 이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신세계>는 부분적으로 강렬하고 매력적이지만 전반적으로는 다소 둔탁하다. <무간도>의 주인공이 처한 정서적 절망감, <흑사회>의 난폭하고 거친 그러나 흥분되는 폭력성, <대부>의 장르적 우아함을 한꺼번에 전부 갖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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