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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의 TVIEW] 쓴맛뿐인 길티 플레저 <상속자들>
2013-11-12
글 : 최지은 (웹매거진 아이즈 기자)
사랑과 현실은 별개인 1% 상속자들의 섬뜩한 로맨스
SBS 드라마 <상속자들>.

<친구는 NO, 사랑은 YES>라는 만화를 본 건 중학생 때였다. 조별 과제를 함께하던 친구의 방에서 우연히 펼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과제는 친구 혼자 하고 나는 “다음권 없냐?”며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게 일본 만화 <꽃보다 남자>의 해적판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일본 문화 개방 전이라 배경이 프랑스로 바뀌어 있던 만화의 여주인공 이름은 비앙카, 또 다른 해적판 <오렌지 보이>는 한국 배경이었는데 남주인공 이름은 황보명이었다. 물론 이름은 상관없었다. 지구상에서 손꼽히는 재벌 가문의 아들이 가난한 집 딸을 좋아하며 괴롭히는데 다른 재벌 아들도 같은 여자아이에게 잘해주며 좋아하고, 명품으로 칠갑한 채 전용기를 타고 다니는 이 미남들이 다 고등학생이라는 게 중요했다. 머리카락이 귀밑 3센티미터 아래로 내려오거나 교복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가면 손바닥을 맞던, 학생의 사치는 죄악이고 연애는 날라리들만 하는 거라 배우던 우리에게 <오렌지 보이>는 수업시간 책상 아래서 손에 손을 거치며 전교를 휩쓴 길티 플레저였다. 미드 <가십걸>을 본 건 직장인이 되어서였다. 뉴욕의 부잣집 아들딸이 쇼핑하고 파티하고 사립학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에, 정신을 차려보니 빠져들어 있었다. 비만과 여드름 같은 건 유전자에서부터 배제시킨 것처럼 예쁘고 늘씬하고, 예일대에 갈까 컬럼비아대에 갈까 고민하지만 어차피 부모 사업을 물려받을 거라 돈이나 취직 걱정 없는 십대들의 이야기는 공허한 대신 자극적인 맛이 있었다.

그러니 <꽃보다 남자>의 구도에 <가십걸> 스타일을 믹스한 듯한 SBS <상속자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이하 <상속자들>)에 은근한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KBS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였던 이민호와, 데뷔 이래 꾸준히 ‘이 구역 반항아는 나야!’임을 증명해온 김우빈, 순정만화 속 소녀의 현신 같은 박신혜를 비롯해 화제성 높은 스타들이 줄지어 선 캐스팅도 흥미를 끌었다. 하지만 언어장애가 있는 엄마(김미경)가 도우미로 일하는 재벌 회장 집에 얹혀살게 된 차은상(박신혜) 외에 거의 모든 십대들이 ‘경영상속집단, 주식상속집단, 명예상속집단’을 자처하며 학교 안의 카스트제도를 공고히 하고 ‘사배자(사회배려자) 집단’을 노골적으로 비하하는 이 세계에는 폭력에 대한 성찰이 없다. 김탄이 사는 화려한 세계와 은상이 속한 초라한 세계의 빈부 격차는 단지 로맨스에 위기를 더하는 데만 사용될 뿐이고, 가난한 어른보다 훨씬 큰 권력을 지닌 미성년자들이 ‘다른’ 계급을 대하는 폭력성은 그들의 입을 통해 당연한 현실 세계의 룰처럼 그려진다. ‘사배자’ 준영(조윤우)에게 지속적인 린치를 가하며 “앞으로도 니 인생은 쭈욱 이럴 거야. 우리가 커서 니 고용주가 될 테니까”라고 위협하던 최영도(김우빈)가 딱 한번 반격을 가한 준영에게 고소장을 내밀어 결국 무릎 꿇리고 한 사람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 것과 별도로, ‘거칠어 보이지만 좋아하는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투른 남자아이’로서의 매력을 드러내는 전개는 너무나 태연해서 섬뜩할 정도다. 계급사회 최상층에 있는 김탄이 준영을 도우려는 은상을 제지하며 “약자가 약자 편에 서면 ‘약자들’이 될 뿐”이라고 충고하는 것은 은상을 위한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슈퍼갑’의 입장에서 바라본 약자들의 연대란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깨닫게 한다. 그래서 <상속자들>의 자극적인 맛은 종종 강렬함을 넘어 마음을 찌르고 벤다. ‘길티’와 ‘플레저’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길티 플레저는 힘을 잃는다. 마지막에 남는 건 쓴맛뿐이다.

슈퍼갑의 고백법

다음 중 은상을 향한 김탄의 애정공세가 아닌 것은? ① 혹시 나 너 좋아하냐? ② 나 여기서 너 안고 싶으면 미친놈이냐? ③ 지금부터 나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 ④ 근데 너 나 싫지? 정답은 4번. 김탄보다 한참 뒤처져 사랑을 깨달은 최영도의 대사로, “니가 좋아져서”라는 앞의 고백이 무색하게 소심한 방어다. 물론 이중 어떤 대사도 현실에서 사용하지는 않길 권한다. 자칫하면 미친놈 취급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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