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iew]
[유선주의 TVIEW] 숨을 곳 없는 수치심
2014-04-08
글 : 유선주 (칼럼니스트)
감시와 통제력에 관한 이야기 <밀회>
JTBC 드라마 <밀회>.

단둘뿐인 공간에서 ‘선생님의 남편이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같은 방을 쓴다니 기분이 이상하다’고 서툴게 말을 잇는 스무살 연하의 남자를 바라보는 마흔살 여자의 얼굴. 침착하려 애쓰는 표정 안쪽으로 사랑의 말들을 흡수하는 그 얼굴에 도리어 이쪽이 무언가를 들킨 것처럼 긴장하고 만다. 독학으로 재능을 쌓은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유아인)나 서한그룹 예술재단 산하 아트센터의 기획실장 오혜원(김희애)처럼 범상치 않은 부류의 사랑에 공감의 숟가락을 얹기 뭣해서, 사바나 초원의 생태계 다큐인 양 거리를 두려 해도 쉽지가 않다. JTBC 드라마 <밀회>를 볼 때면 이런저런 감정 중 유독 수치심에 반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 카메라는 혜원이 선재를 보는 시점으로 연하남의 수줍은 질투를 화면 가득 서비스하는 대신, 선재를 올려다보는 혜원이 어떻게 반응하고 언제 이성의 끈을 놓는지 측면에서 기록한다. 선재에게 달려들어 키스하고도 “나 지금 너 아주 무섭게 혼내준 거”라며 자신의 영향력을 각인하고 관계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혜원을 보고 있자면 이쪽 얼굴이 달아오른다. 종종 둘의 관계와 감정을 관찰하는 화면 너머 이쪽을 예민하게 각성시키는 짓궂은 카메라는 두 사람을 엿보는 즐거움에 푹 젖거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타인의 사랑 놀음으로 선을 그을 수 없게 만든다.

인적 없는 곳에서 코를 파다 CCTV를 발견하면 머쓱해지는 것처럼 앞서 말한 수치심은 카메라나 시선을 인지할 때 찾아온다. 아트센터 연습실에서 잠든 혜원의 발끝에 걸린 구두쪽으로 슬그머니 다가가는 선재의 모습도 통제실 CCTV를 관리하는 경비원에 의해 곧바로 혜원에게 보고되었다. 스스로 ‘3중 간첩’이라 밝히는 기획실장 혜원의 업무 역시 이와 유사한데, 회장의 외동딸인 아트센터장 서영우(김혜은)와 재벌회장의 후처가 된 재단 이사장 한성숙(심혜진), 둘을 경쟁시켜 딸을 훈육하는 회장 서필원(김용건)은 서로 감시하고 관리할 필요하에 유능한 고용인 오혜원을 세워둔다. 감시의 눈을 통제할 권한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녀 앞에서 치부를 드러낼 때도 부끄러움이 없다. 자기 집 소유의 CCTV 앞에서 코를 파는 이들에게 수치는 약점이 되지 못한다. 정성주 작가와 안판석 감독의 전작 <아내의 자격>이 대치동 사교육 그룹, 학연과 지연, 가사도우미를 통한 아파트 내 소문을 활용하는 각자의 네트워크 싸움이었다면, <밀회>는 감시와 통제력에 관한 이야기로 보인다. “내가 힘을 써서 붙여줘야 확실히 내 것이 될 거 아냐.” 혜원의 남편이자 서한음대 교수인 강준형(박혁권)이 선재에게 입시를 권하는 이유도 이에 대한 갈망이고, 싼 악기를 쓰는 제자 앞에서 상대가 알아듣지 못하는 독일어로 멸시하는 첼로 교수 역시 저열한 방식으로 힘을 즐긴다. 그럼, 재벌가와 음대 입시비리로 엮인 좁은 세계를 벗어나면 어떨까?

어머니의 죽음으로 입시를 포기한 선재는 동사무소 공익으로 배치된다. 축구시합 핑계로 선재에게 숙직을 미루곤 “불만 있냐?”고 집요하게 이죽거리던 공무원은 우습게도 선재가 동네 발레교습소 반주자의 연주를 참다못해 깽판을 치고 잡혀가자, 조서를 작성하는 경찰 앞에서 열성적으로 선재를 변호한다. “선배님. 이 친구 얌전하고 성실해요. 폭력성이라곤 전혀….” 선재를 퍽이나 아낀 탓일까? 컨트롤하기 곤란한 상대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의식. 혹은 영향력을 과시해 후일 생색을 내려는 강준형 같은 속셈이겠지. 재벌가에서 동사무소까지 짜내려가는 치밀한 세계. 연인들의 정념이 폭발하는 순간조차 낱낱이 해체하는 <밀회>를 볼 때만큼은 어디 몸 숨길 곳이 없다.

그녀의 집까지 5.6km

혜원을 배달 오토바이 뒤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준 선재가 말했다. “여기 저희 집에서 무지 가까워요. 뛰어서 30분 정도?” 아침에 조깅 삼아 집 앞을 지나갈 테니 밖을 봐달라는 문자에 문득 둘 사이의 실제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졌다. 혜원의 집이 종로구 청운효자동, 선재네 집은 중구 오장동. 포털 사이트에 지리검색을 해봤더니, 약 5.6km에 도보로 1시간20분 거리다. 힘이 펄펄 넘치는 스무살 젊은이의 체력을 생각하면 얼추 시간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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