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iew]
[김호상의 TVIEW] 아픈 청춘의 적나라한 보고서
2015-05-12
글 : 김호상 (KBS 라디오국 PD)
tvN 드라마 <초인시대>

중학생 시절, 아니 고등학생 시절까지 연결되는 추억 중에 일명 ‘책차’가 있다. 자그마한 크기의 빛바랜 베이지색 차에는 책이 가득 실려 있었고, 그 책들은 주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와 같은 베스트셀러이거나, 만화이거나, 세계문학 전집류가 아니라면 무협지였다. 중간고사가 끝나면 내가 받게 되는 선물이 밤을 새워 무협지를 읽을 수 있다는 거였다. 김용 작가의 <대륙의 별>(원제 <천룡팔부>), <아! 만리성>(원제 <소오강호>) 같은 작품들을 이부자리 옆에 쌓아놓고, 한권씩 격파해나갔다. 그 책들의 종이 냄새와 새벽 3시10분을 가리키는 탁상시계의 바늘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난 그때 무언가로부터, 초인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tvN에서 매주 금요일 단 1회씩 방송되는 <초인시대>. <SNL 코리아>의 ‘극한직업’ 코너를 통해 청춘의 대변자로 자리매김한 유병재가 각본을 쓰고, 직접 주연까지 맡은 드라마다. 그가 연기하는 병재는 공대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생. 드라마에서 표현되듯이 대부분 ‘아쉬운 편’에 서 있는 아픈 청춘이다. 후배들과 엮인 조별 과제에서도 모든 일을 떠맡으며 ‘더 아쉬운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하게 된’다고 중얼거리고, 맘에 있던 과 후배와 시작조차 못한 짝사랑을 접으면서도 ‘더 아쉬운 사람이 더 아파야 한’다고 흐느낀다. 이런 그가 초인이 되는 스토리는 이렇다. 월세를 석달이나 밀려 쫓겨나면서 어쩔 수 없이 찾은 인력 관리소, 그곳에서 그는 이상한 소장을 만난다. 병재에게 초능력이 있다며, 그 초능력을 이용해 함께 지구를 지키자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자신 안에 잠자고 있던 초능력을 깨달으며 ‘초인’이 된 병재, 그리고 같은 처지의 두 친구, 창환과 이경. 이들은 이경의-역시 월세가 석달 밀린- 차고에서 의기투합한다. 병재는 초능력을 이용하여 어느 그룹사의 면접을 37번 다시 본다. 하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불합격. 아프고 무기력한 청춘에 대한 통쾌한 해결 방법으로만 초인의 설정이 사용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능력은 연애와 결혼에 대한 무관심, 학자금 대출과 월세방 전전, 그 어려운 과정을 뚫고 들어간 취업의 마지막에는 치킨집 창업이 기다린다는 우리 사회의 아픈 자화상을 교묘하게 풍자하는 데 쓰인다. ‘세상에 곧 위험이 닥쳐, 망한다’라고 초능력자들을 불러모으지만 정작 ‘나도 언제인지는 모르지’라고 진지하게 말하는 소장. 거기에 ‘근데 아르바이트가 4시라서 지금 가야 해요’라며 자리를 뜨는 병재. 분명 ‘열정폭발’ 코미디 드라마여야 하는데, 가볍게 읽히지 않아서 곤란한, 이 드라마는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조금의 헛디딤도 어김없이 루저로 연결되는 대한민국의, 모든 초인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 α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

원맨쇼를 하고 있는 유병재가 드라마에 얹힐 음악도 고른다. 그리고 그 중심에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음악이 자리한다. 인디 가수로 활약하다가 지난 2010년 세상을 떠난 고 이진원의 1인 프로젝트 밴드. ‘세상도 날 원치 않아. 세상이 왜 날 원하겠어, 미친 게 아니라면’이란 가사를 담고 있는 <절룩거리네> 외에도 <치킨 런> <요정은 간다> <Show Me the Money> 등이 드라마에 흐른다. 패배자의 정서를 대변하는, 오히려 사후에 더 주목받았던 그의 음악들. 정형화된 사회에 다만 한마디라도 자유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그 역시, 우리가 아쉽게 놓쳐버린 한명의 초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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