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기예르모 델 토로의 고딕 멜로드라마 <크림슨 피크>
2015-11-25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이디스(미아 바시코프스카)는 유령을 보는 소녀다. 그녀가 유령을 처음 본 건 10살 무렵, 어머니를 여읜 직후다. 당시 이디스에게 나타난 끔찍한 몰골의 유령은 그녀에게 ‘크림슨 피크를 조심하라’는 말을 남긴다. 그로부터 14년 뒤, 그녀는 사교계를 멀리하고 혼자 소설 쓰기를 즐기는 고집쟁이 숙녀로 자란다. 그녀는 최근 유령에 관한 소설을 쓰는 중이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번번이 퇴짜를 놓는다. 당시 사회가 여성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은 로맨스 소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유령이라는 소재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영국 귀족 토마스(톰 히들스턴)가 아버지의 회사를 방문한다. 그에게 우연히 자신의 소설을 보여주게 된 이디스는 자신의 작품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토마스에게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고딕 멜로드라마로 돌아왔다. 델 토로의 영화 세계에 발을 들인 이들이라면 그가 장르의 외피를 두르는 동시에 거기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는 영화를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것이다. <식스 센스>적 설정에서 시작한 영화는 그 장소를 영국의 기괴한 대저택으로 옮기자마자 소설 <위험한 관계>와 <제인 에어>를 적절히 섞은 듯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제시카 채스테인이 연기한 토마스의 차디찬 누나 루실은 토마스와 이디스의 연결을 종용하는 동시에 둘 사이를 은밀하게 방해하는 것처럼 보인다. <제인 에어>에서 저택이 은밀한 비밀을 간직했듯이, <크림슨 피크>에서의 저택 역시 하나의 캐릭터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입구에서 저택까지 난 기나긴 길, 밖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낡은 천장, 작은 엘리베이터로 연결된 비밀스러운 지하 공간 등 스산한 공간이 주는 존재감이 또렷하다. 그 자체로 죽음을 표상하는 곳에 온기를 불어넣는 것은 믿음직한 배우들의 몫이다. 저택 속 두 남매의 존재는 감독의 전작 <퍼시픽 림>에서 로봇 예거의 몸에 들어간 롤리와 마코를 떠올리게 한다. 공간은 섬세하게 재단된 의상과 마찬가지로 캐릭터를 잘 설명해준다. 공포, 서스펜스, 멜로, 시대극, 심지어 예상치 못한 코믹 코드까지 장르의 외피를 두른 온갖 감정들이 솟아오르는 기이한 경험의 세계로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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