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박소미의 영화비평]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
2016-02-25
글 : 박소미 (영화평론가)
영화적 여정을 시작하고 마치는 <캐롤>의 언어
<캐롤>

<캐롤>은 마치 고풍스럽게 세공된 붉은 타일을 길고 가느다란 손으로 하나씩 조심스럽게 이어붙여 만든 우아한 조각품 같다. 모든 조각이 아름다워 어느 한 조각도 쉽게 집어들고 묘사할 수 없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중 하나를 꼽아야 한다면, 본연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회귀의 테마를 형식, 인물, 소품, 내러티브라는 층위에서 정교하게 구현해내는 정치(精緻)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다.

원작 소설과의 차이점

멜로드라마에는 두 연인을 갈라놓는 장벽이 등장하곤 하는데 캐롤(케이트 블란쳇)과 테레즈(루니 마라)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그들이 동성을 사랑한다는 점 자체다. 캐롤의 남편 하지(카일 챈들러)가 단적인 예다. 하지는 이혼을 원하는 캐롤을 붙잡기 위해 한편으로 그녀에게 애원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녀의 성적 지향성을 문제 삼아 공동 양육권을 거부하며 그녀에게 무언의 협박을 가한다. 동성애자인 캐롤이 이성애자인 자신에게 돌아올 수도 있다는 기대와 성적 지향성을 도덕이나 법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것, 바로 그러한 1950년대의 통념이 두 사람이 마주하게 되는 가장 큰 장벽이다. 실제로 둘의 이별은 하지로 인해 촉발되고, 캐롤이 양육권을 되찾으려면 당시의 사회규범이 강요하는 이성애자 행색을 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면서 결행된다. 그러므로 재회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이 성적 지향성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또 지켜내는 과정을, 즉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여정을 동반한다. 그렇다면 <캐롤>을 정치적인 멜로드라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것이 <캐롤>이 지닌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하지가 성적 지향성을 빌미로 공동 양육권을 거부했다는 말을 들은 뒤, 캐롤이 습기 어린 창 너머로 바라보는 거리는 온통 탁하고 뿌옇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갑갑하다고 느끼는 캐롤의 감정이 투영된 풍경일 테다. 캐롤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부로 여행을 떠난다. 캐롤이 테레즈에게 함께 가자고 말할 때, 하수구에서 시작해 밤하늘로 이동하던 인상적인 첫 장면의 변주처럼 화면이 다시 한번 하늘 위로 틸트업(고정된 촬영기를 밑에서 위로 움직여 촬영하는 것)하며 새로운 막의 시작을 카메라의 운동으로 아로새긴다. 여행과 관련해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원작 소설과 영화의 큰 차이점 하나가 드러나는데 바로 캐롤이 집에 대해 갖는 의미다. 소설에서 캐롤은 (양육권 소송을 벌이긴 하지만) 영화처럼 린디를 끔찍이 여기지도 않고 “린디와의 관계도 별로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집과 린디라는 구심력은 영화에서 보다 강력하게 작용한다. 여행 첫날 캐롤은 테레즈에게 남자친구 생각이 나지 않느냐고 묻고 테레즈는 리처드(제이크 레이시)는커녕 집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답한다. 이에 캐롤은 혼잣말로 “집…”이라고 읊조리는데 그녀의 쓸쓸한 얼굴은 처음부터 이미, 쾌활하기만 한 테레즈의 답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집이라는 문제로의 귀결을 예감하고 있다.

서부를 떠돌며 둘의 사랑은 깊어지지만 여행은 오래지 않아 중단된다. 하지가 캐롤의 동성애를 증명하기 위해 사립탐정 토미(코리 마이클 스미스)를 붙였기 때문이다. 이를 알게 된 캐롤이 급히 집으로 돌아가며 테레즈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일은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이 문장의 행간을 읽기 위해서는 번역이 드리운 얇은 막을 거두어야 하는데 본래 대사는 “Everything comes full circle”이다. 원문이 가리키는 원의 형상이 <캐롤>을 관통하는 모티브다. 둘의 사랑도, 도피와도 같았던 여행도, 그리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차도 모두 저 문장의 자장 안에 있다. 첫 만남의 계기가 되는 장난감 기차는, 둘의 인생을 새로운 궤도 위에 올려놓았던 그 기차가 레일 위를 돌고 도는 모습은, 영화 전편을 감싸는 회귀의 여정에 대한 은유이자 암시다. 여행은 처참히 끝났다. 예고되었던 그 실패는, 회귀의 여정이 마무리되기 위해선 하지로 대변되는 현실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그것과의 대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캐롤과 테레즈의 회귀의 여정에 훼방을 놓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회귀의 여정이 끝내 멈추지 않았음을 부각시키는 장치는 하지, 토미, 리처드와 같은 남성인물들이다. 남성이라는 표면적인 특징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이들이 타인의 성향에 폭력적일 정도로 무감각하다는 점이다. 동성애에 대한 하지의 무지와 편견에 대해서는 이미 서술했으며, 토미는 그러한 하지의 귀와 눈을 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재밌는 것은 실용품 판매원으로 가장한 장면에서 토미는 세상의 어떤 커피라도 맛있다고 말할 만큼 무색의 취향을 가진 인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그가 테레즈와의 대화에서 그녀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하나도 추천하지 못한다는 설정 또한 타인의 취향에 대한 그의 무딘 감각을 비꼬는 유머다. 그리고 리처드. 테레즈가 한껏 부풀어 포트폴리오에 대해 말할 때 리처드는 자신이 말한 여행은 생각해봤냐며 그녀의 말을 일축한다. 테레즈가 무심한 그를 쏘아보자 그는 “테리!”라고 외친다. 테리, 테레즈가 일했던 프랑켄베르그 백화점의 예쁜 인형들에나 어울릴 법한 이름. 이는 캐롤이 테레즈를 만나 가장 먼저 했던 일이 테레즈 벨리벳이라고 그녀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하는 일이었던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테레즈는 리처드를 떠나 캐롤을 만난 뒤 비로소 본연의 모습을 찾아간다).

캐롤이 테레즈를 떠난 뒤 돌아가야 하는 세계는 하지-토미-리처드로 대변되는 곳이다. 캐롤은 동성애로부터의 “회복”이라는 명목하에 치료를 받고 점심 대신 토마토젤리를 먹을 것을 요구받는다. 스스로를 위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 시기의 캐롤은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붉은옷을 단 한번도 입지 못한다. 그러던 중 캐롤은, 초반과 달리 이제 완연히 성숙한 자태를 갖춘 테레즈가 고혹적인 붉은 원색의 옷을 입고 본인이 원하던 신문사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영화에서 의상은 단지 고급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캐롤은 테레즈가 테레즈의 자리를 찾았음을 깨닫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이 찰나의 강렬한 마주침과 캐롤의 미소를 통해 영화는 캐롤 또한 캐롤의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예고한다.

다시 재회 장면으로…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양육권 분쟁 장면이다. 짙은 남청색 모자에 연회색 옷을 입은 캐롤은 파리한 얼굴로 양육권을 포기하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를 부정하며 산다면 린디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이 문장은 아프게 정곡을 찌른다.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말처럼 허황되게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가 요구하는 틀에 자신을 맞추지 않은 대가로 때로 많은 것을 포기하며 스스로를 지켜내는 고된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영화의 첫 장면이 반복된다. (기본적으로 <밀회>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지만) 재회 장면으로 시작해 회상을 거친 뒤 다시 재회 장면으로 되돌아오는 형식은, <캐롤>이 두 사람의 사랑이 제자리를 찾아 먼 길을 돌아온 영화적 여정이었음을 강조한다. 오프닝에서 아직 검은 무지 화면뿐이었을 때부터 적막을 뚫고 들려오던 열차 소리, 회상 장면의 시작을 알렸던 장난감 기차의 회전, 엔딩에서 테레즈가 캐롤의 제안을 승낙하기 위해 호텔로 향할 때 다시 들려오는 들뜬 열차 소리. 그 영화적 여정의 종착점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다가가던 첫 만남과 대구를 이루며 이번에는 테레즈가 캐롤에게 다가갈 때 <캐롤>의 이야기도 완결된다. 이토록 매혹적인 영화라는 여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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