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 리뷰]
거친 공간과 위태로운 인물들의 관계 <설행_눈길을 걷다>
2016-03-02
글 : 윤혜지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는 남자가 “잘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당부를 등지고 홀로 산길을 오른다.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있는 정우(김태훈)다. 정우는 외딴 수도원으로 향한다. 들어가기 전, 담배나 한대 피우려고 주머니를 뒤적이는데 라이터가 없다. 난감한 것도 잠시, 곧 수녀 마리아(박소담)가 나타나 슬그머니 성냥갑을 내려놓고 사라진다. 그 뒤로 정우는 마리아에게서 까닭 없는 보살핌을 받게 된다.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정우는 금단 증상으로 숱한 혼몽을 겪는다. 마리아는 자꾸 위축되어가는 정우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한편, 입 밖에 내지 않는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정우는 수도원을 찾은 포수 베드로(최무성)가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해갈은 요원할 뿐이다.

제1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전주 프로젝트: 삼인삼색 2015’ 중 한편으로 제작된 <설행_눈길을 걷다>는 김희정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곁에 있던 누군가를 떠나보낸 뒤의 상실과 남겨진 이의 극복을 살피고 있다. 자신을 세상에서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무기력한 남자가 주변의 도움으로 기운을 회복하고 자립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이 이야기에서 김태훈은 자신의 경력 중 가장 메마르고 위태로운 인간을 섬세하게 연기해낸다. 공간 이동을 최소화한 간결한 프로덕션도 돋보인다. 회색톤의 차갑고 건조한 공간은 나주 노안성당의 일부를 개조해 만들었고, 눈밭 장면은 덕유산 무주리조트에서 촬영했다. 거친 공간이 인물의 정서와도 조화를 이루어 영화의 황폐한 무드를 고조시킨다. 영화의 질감과 캐릭터의 관계도를 잘 살려낸 촬영도 인상적이다.

간혹 지나친 상징과 은유 때문에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관점에 따라선 허세로도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마리아의 비밀이 마리아의 캐릭터, 정우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고 있는지도 의문을 품게 한다. 조금 더 압축될 수 있었을 설정이 산만하게 흩어져 있다는 인상도 준다. 다만 감독의 취향과 고민은 전작들에서보다도 훨씬 안정적으로 구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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