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갱년기 소녀>, 끔찍한 재미
2017-11-13
글 : 이다혜
<갱년기 소녀> 마리 유키코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재미를 잃는다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사실대로 말하면 나는 여전히 미취학 아동 때 그림책 읽던 것처럼 책을 좋아하고 쉽게 빠져든다. ‘센’ 소설을 읽으면 바로 그날 밤 꿈에 반영된다는 말이다. 마리 유키코의 <갱년기 소녀>를 읽고 나서 밤새 꿈속에서 나는 소설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되었는데, 소설 내용으로 꾼 꿈의 감정적 지저분함으로 따지면 역대급이었다. 바로 이게 ‘이야미스’다. 싫다는 뜻의 ‘이야다’(いやだ)와 미스터리의 합성어인 ‘이야미스’는 그야말로 읽고난 뒤 뒷맛이 더러운 특징을 지닌다. 고전 미스터리들이 퍼즐 풀이의 깔끔함을, 인간 지성의 승리를 맛보게 한다면, 이야미스는 사건이 해결되거나 전모가 밝혀진 뒤에도 음습한 기운이 가시지 않는다. 그게 특장점. <고백>의 미나토 가나에, <유리고코로>의 누마타 마호카루, 그리고 <여자친구> <갱년기 소녀>의 마리 유키코가 쓰는 작품들이 이야미스로 분류된다. 여성 작가가 특히 발군의 활약을 한다는 것도 흥미롭다. 인간을 가장 괴롭히는 끈적하고도 음습한, 아무리 노력해도 따뜻하고 밝은 빛 아래로 끌어내기 불가능한 감정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나다고 해야 할까. 이성으로 대처가 불가능한, 사회와 가정의 가장 안쪽 그늘진 곳에서 자라난 원념(怨念). 극단적인 상상이 사랑받는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것이 반영하는 사회의 모습이 있다는 뜻이다.

<갱년기 소녀>는 1970년대 큰 인기를 끈 전설의 순정만화 <푸른 눈동자의 잔>의 ‘여전한 열성팬’들의 이야기다. 40~50대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푸른 6인회’는 팬클럽 안에서도 열렬한 팬심을 자랑한다. 2차 창작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원작이 아닌 2차 창작 작가의 팬덤이 형성되기도 한다.

본명 대신 닉네임으로 소통하는 ‘푸른 6인회’. 서술방식의 어떤 특징과 이런 설정을 보면, 트릭을 간파할 수도 있다. 일단 등장인물을 소개하면 이런 식이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에밀리는 ‘푸른 6인회’의 신규 멤버. 말 많고 잘난 척 잘하는 실비아와 모임의 리더 마그리트, 어머니와 사는 미레유,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한 지젤, 그리고 모임의 아이돌 같은 존재로 선망의 대상이기도 한 가브리엘. 그런데 <푸른 눈동자의 잔>의 갑작스럽고 괴상한 엔딩 때문에, 일종의 저주가 깃들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다는 것이다. 소피라는 멤버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과거의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섯 사람이 공교롭게도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저주는 정말 있는 것일까. 범인은 누구일까.

여성이 주축이 되는 팬덤, 2차 창작을 동반하는 열성 팬덤의 폐쇄적인 문화, 좁은 커뮤니티 안에서 서열이 생기고 그것이 권력관계로 작동하는 원리, 중년이 된 뒤 세상의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가는 가운데 현실에 부적응하며 좋았던 시간의 경험으로 후퇴하는 심리 등이 <갱년기 소녀>에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몇건의 살인사건이 벌어지는데, 살인사건 대목은 언론에 보도된 것을 인용하는 식으로 전달하고, <푸른 눈동자의 잔>의 ‘푸른 6인회’ 멤버들의 심리는 한명씩 돌아가며 그려진다. ‘푸른 6인회’ 멤버의 딸이나 어머니의 눈으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전히 소녀이고 싶은 마음은 푸르지만, 타인의 눈으로 바라본 그들은 무책임하거나 현실 부적응인 경우도 있다. <갱년기 소녀>는 그런 상황에 속한 사람들의 심리를 지긋지긋할 정도의 꼼꼼함으로 묘사한다.

이야미스에 카타르시스라고 부를 만한 부분이 있다면, 그 신물나는 인간 혐오를 전시하는 부분에서 느끼는, 타인을 비웃고 증오하는 마음을 누군가가 펼쳐놓은 글을 읽으며 느끼는 ‘나쁜 만족감’일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편견을 전시하는 표현들. 그런데 그런 말에 둘러싸여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게 어떤 성질의 것이겠는지 생각해보라. 만족감을 확인하는 순간 두배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마음속에 쓰레기가 있다고 아는 것과 그것의 생김을 확인하는 것은 다르다. 그러니 이야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