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서울국제여성영화제⑤] 배우 이영진,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페미니스타’
2018-06-13
글 : 이화정
사진 : 오계옥
“언론이 앞장서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한다”

2016년 11월 <씨네21>에서 시작한 ‘영화계 내 성폭력’ 연속 대담 첫 번째 대담자로 배우 이영진에게 참석을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해주었다. 이영진의 발언은 이후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면서 영화계 내에서 공론화가 되는 데 포문을 열어주었다. 이영진의 ‘날선’ ‘사이다’ 언어는 여성에게 차별이 가해지는 곳, 미투 운동 곳곳에서 큰 힘을 실어주었다. 20주년을 기념하는 여성영화제 역시 차별과 억압을 향해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이영진의 그 확고한 언어를 필요로 했다. 김아중, 한예리에 이어 3대 페미니스타로 선정된 이영진은 영화제 첫날부터 개막식 사회, 아시아단편경쟁 심사위원, 토크 참석 등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페스티벌 곳곳에서 영화제의 ‘얼굴’이 아닌, 그 정신과 가치를 대변할 ‘언어’로 그녀의 말들이 관객에게 큰 힘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그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마침 데뷔 20주년이기도 한 그녀에게 이번 홍보대사 활동은 자기 점검의 시간이자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되새기고 더 확고히 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올해가 데뷔 20주년이 되는 해이다. 20회 영화제에서 홍보대사 ‘페미니스타’로 활동하고 있는데 그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계기도 됐을 것 같다.

=화제로부터 처음 제안을 받고 ‘이 중요한 일을 왜 나에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평소 여성영화제 하면 여성을 위한 발언을 하는 창구이자 지원을 많이 해준다는 좋은 인식이 있었다. 가고 싶은 영화제였고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해준 게 영광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쩌면 나한테 올 기회가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앞장서서 발언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지금은 이영진이라는 배우에게서 그걸 기대하게 된다. 그만큼 여성 문제에 대해 지면이나 방송을 통해 용기 있게 발언해왔다.

=나 역시 두려움이 없지는 않다. 말 그대로 ‘죽이겠다’고 하는 말들이 들리니까. 요즘은 인스타그램 디엠을 아예 열어보지 않는다. 폭언은 물론이고, 성기 사진 같은 것들이 전부다. 신고한 것만도 100건이 넘는데 이를 방지할 뾰족한 방법이 없다. 원래 직접 만났을 때 말 못했던 팬들이 디엠으로 ‘언니’ 하면서 응원해주고 그걸 보는 게 소소한 기쁨이었는데 완전히 차단된 거다. 물론 원색적 비난은 무시해야지. 그걸 다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는다. 말도 안 되는 비판이라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변영주 감독과 개막식 사회를 봤는데, 행사 취지와 달리 ‘과감한 시스루 패션’이라는 제목이 쏟아질 때는 자괴감도 들었을 것 같다.

=돌아보면 한번도 내가 나온 사진이 참석의 목적과 맞은 적이 없었다. 영화 홍보 행사 때도 그렇고, 늘 외모와 의상에 대한 품평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여성영화제 행사라면 적어도 이렇게 소비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미투 운동에 힘을 싣고 여성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언론이 앞장서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데뷔 20년의 활동 기간을 돌아볼 때, 그래도 최근 여성 문제에 앞장서 나가면서 체감하는 긍정적 변화가 있다면 어떤 거였나.

=나는 여중, 여고를 나왔고 가족들도 어머니와 언니라 여성들이고, 처음 활동한 패션계도 여초 사회였다. 그러다 영화계로 오게 되자 충격이 컸다. 그때는 이게 뭐지, 불쾌한 감정이 들더라. 여혐, 가스라이팅 같은 언어가 없었던 때고 이 감정을 설명을 못하겠더라. ‘부당한 거 아니야?’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걸 규정해서 말할 수가 없던 때였다. 작품을 하면 항상 여자배우와 소통이 더 편했고, 끝나고 나서도 남성이 아닌 여성배우들과 친분이 이어졌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 부당함 속에서 피하게 된 거지 싶더라. 나서서 뭘 하는 성격이 아닌데 이제 그 차별과 편견을 알아버린 이상 위협의 시선이 있어서 도망다니고 싶지는 않다. 다행히 최근에는 현장에서 성평등 교육이 생활화되었다. 드라마쪽는 좀더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성 PD들이 주축이 돼 이쪽도 많이 변화하고 있다. 드라마 <위대한 유혹자> 때는 외주 제작사, 스탭, 매니저까지 리딩 전에 모두 성평등 교육을 받았다. 또 매회 대본 앞에 ‘촬영현장 성희롱 예방 가이드’가 포함됐다. 현장에서 성폭력을 묵인하거나 동조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아직 제목을 밝히지는 못하지만, 차기작으로 캐스팅부터 성비를 맞추어 진행하는 작품에 출연하게 되었다.

-아시아단편경쟁 심사위원으로 참석한다. 봐야 할 영화가 이미 많다.

=지금 9편 봤고 10편을 더 봐야 한다. 어제도 영화를 연달아 보면서 커피를 다섯잔이나 마셨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지만 그보다 출품작들을 보니 심리적으로도 부담이 되더라. 여성 문제를 다룬다고 해서 꼭 비참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여성들의 삶을 블랙코미디로 그릴 수도 있을 텐데, 영화들이 대부분 무거워서 보는 데 힘이 들더라.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이고 이런 콘텐츠를 자주 접하지 않는 이들에게 거듭 설명해줘야 하기도 하지만 무거운 이야기들을 접하다보니 심리적으로 힘이 든다. 서울프라이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요즘 자유롭고 귀여운 영화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영화제를 자주 찾는 관객에게 숨 쉴 수 있는, 조금 열려 있는, 밝은 영화들이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

-발언 때마다 ‘개념배우’라는 수식어가 추가되는데, 그런 수식 역시 차별적인 시선에서 비롯된 면이 없잖아 있다.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 기준도 궁금하다.

=역할로 보자면, 자꾸 ‘잔다르크’가 주어지는 것 같아서 나 역시 쉽지는 않다. (웃음) 최근엔 정말 많은 곳에서 참석해서 발언해줄 것을 요청해오는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만큼만 하려고 한다. 소신을 가지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지 능력 이상의 것을 무리해서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출연작에 대해서도 ‘이영진 배우가 그런 차별적인 시선의 작품에 나올지 몰랐다’고 하는데, 사실 그런 모든 걸 다 빼면 배우들이 당장 할 작품이 없지 않나. 소비층이 이제는 그런 작품에 불매 목소리를 내주길 바란다. 내가 출연한 작품이라도 그런 지점이 보인다면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 혼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바꿔야 한다. 그게 결국 연대의 의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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