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천국보다 낯섦
2019-02-20
글 : 이동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정원교 (일러스트레이션)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안 그래요?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 영화, 책, 요리. 전부 준비했어요.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좋아할,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이죠. 천국이 따로 있을까요? 당신에게 맞추어진 세상.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 우리가 마련한 그대의 기호와 취향. 어때요? 파라다이스 크루즈.”

김씨는 반신반의했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이 결합한 최초의 개인 맞춤형 여행 상품은 새로운 차원의 것이었다. 일단 가격부터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김씨는 의구심이 생겼다. 모든 게 완벽하다니 말이 돼?

‘광고 문구는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침실 호수의 숫자조차 내가 좋아하는 숫자로 고려되었고, 식사는 내 입맛에 딱 맞았으며, 유람선에서의 파티나 여가 활동 역시 나랑 잘 어울릴 수 있는 취향과 성격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도록 미리 동선이 짜여 있었다. 직원들과도 얼굴 붉힐 일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이 맞춤 상품은 그동안 김씨가 주로 스마트폰에서 행한 쇼핑 패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을 기반으로 했다. 그뿐 아니라 즐겨 찾는 식당, 운동앱, 영화평가앱, 재생된 동영상, 음악 선호도, 웹 검색기록 등이 동원되어 알고리즘화되었다. 모든 것은 계산되고 예측되어 있었기에 김씨가 무슨 선택을 하든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여정에서 우연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안전하고, 또 안전했다.

모든 건 가장 빠른 지름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 점과 점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직선. 이 여정에 불확실한 타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천천히 미지의 영역을 채워나가며 서로를 알아갈 필요가 없었다. 크루즈측에서 제공한 앱에는 이미 승선한 모든 사람을 분석한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사교 활동에서 앱이 제시하는 제안을 믿고 따르면 되니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시간이나 에너지를 낭비할 헛수고도, 실수도 없었다. 불확실성이 제거되니 모두가 평화롭고 즐거워 보였다. 정말 천국이 이런 것일까.

선상에서 천국의 나날이 한달 넘도록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김씨는 서서히 재미를 잃어갔다. 언제부턴가는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꾸었다. 김씨가 타고 있는 크루즈가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꿈. 공포감에 휩싸여 깨어나 잠을 설치면서도 한편으로 김씨는 이상하게 그 꿈이 싫지 않았다. 그럭저럭 예상되는 만족감이 이어지는 생활이 더이상 즐겁지 않아서일까. 안전한 편안함도 처음과 달리 차츰차츰 갑갑하게 느껴졌다. 불확실성이 제거된 세상에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오늘도, 내일도 비슷한 안락함. 김씨는 우연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절박하게. 그리고 결국 다음에 정박하는 도시에서는 유람선에서 내려 지도 없이 무작정 길을 걸어보리라 다짐했다. 낯선 골목에서 길을 잃어 한동안 헤맬 수도 있겠지만 김씨는 예상치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