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빌리 와일더 / 출연 잭 레먼, 셜리 매클레인, 프레드 맥머레이 / 제작연도 1960년
아마 제2의 중2병 정도를 앓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15살이 아니라 30살 정도였던 것과, 이 병을 이겨내지 못하면 앞으로 내 인생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문제가 걸려 있다는 사실이 실제의 중2병과 다른 점이긴 했다. 당시 나는 몇년에 걸쳐서 시네마테크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수많은 시네필들이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일부러 와서 보는 영화들을 반강제적으로 본다는 사실만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들의 절반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절반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채 지나가곤 했다. 하지만 가끔씩 나를 졸지 않고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정말 ‘재밌는’ 영화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빌리 와일더의 영화들이었다.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들을 보며 이게 과연 한 감독의 작품인가 싶게 만드는 매끈함이 있었다. 빌리 와일더의 영화 중 가장 재밌었던 건 <이중배상>(1944)이었지만 나에게 가장 감정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이다. 나는 멜로드라마를 즐기면서도 항상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너무 달기만 한 사탕이 맛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불행히도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였고 말했듯이 나는 너무 외로웠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영화 안에는 이상한 달콤씁쓸함이 있었다. 영화의 실제 배경인 크리스마스경에 혼자 이 영화를 본다면 너무 좋으면서 죽고 싶은 심정이 들 것 같은. 글을 쓰기 위해 영화를 다시 보았을 때는 멜로드라마의 탈을 쓴 블랙코미디처럼 보였다. 1959년 뉴욕의 불륜 커플들을 위한 에어비앤비(airbnb). 영화 내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남자들의 대환장파티 같은 것이 벌어지는 바람에 솔직히 중간에 영화를 꺼버리고 싶었다. 불편한 것이 한두개가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것들에 대한 냉소와 비판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었다. 가장 이상했던 것은 이 냉소의 방식이었는데,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영화가 단 한순간도 심각해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카메라도 미장센도 편집도 모든 것이 넘치지 않고 지나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 이상한 냉소와 주인공의 따뜻함이 뒤섞여서 진행되는 영화는 가장 솔직하고 쿨한 방식으로 엔딩을 맞는다.
세상에는 내 인생의 영화가 너무 많았지만 내가 그 깊이를 절대 따라갈 수 없다는 생각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 나를 매번 절망적으로 만들었다. 이 영화엔 인생의 거대한 진실도 없고 심장이 멎을 것 같은 롱테이크도 없다. 하지만 인류애에 대한 소박하고 분명한 전달이 있었다. 내가 애초에 손에 잡히지 않는 영화라는 것을 잡기 위해 머리 아파하고 있을 때 이 영화가 나에게 하나의 명료한 길을 주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는 관객을 위한 것이며 재미를 위해서 관객의 목을 꽉 움켜잡고 절대 놓아주지 말라고 했던 그의 말처럼. 영화를 만드는 수많은 길 중 내가 갈 수 있는 어떤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하다 보면 내가 하고 싶었던 것도 언젠가는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
● 안주영 영화감독. 단편 <옆 구르기> <할머니와 돼지머리> 등을 만들었으며 올해 5월에 장편 데뷔작 <보희와 녹양>(2018)이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