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동성이혼을 허하라
2019-12-04
글 : 이동은 (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J가 요즘 유행하는 흑당 버블티에 빨대를 꽂아 쭉 들이켰다. 어제 TV에 생중계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봤어? J의 연인인 L은 J가 이야기를 꺼낸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프로그램에 나온 동성결혼 법제화 이슈를 말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한 국민의 동성결혼 법제화에 대한 물음에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가능하다며 아직은 이르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J는 L에게 말했다. 우리 관계가 사회의 합의가 필요할 정도야? 우린 이미 존재하고 있잖아. 사람들은 다른 개인을 합의해줘야 존재가 가능하다고 여기나? L이 건조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존재를 법적으로 인정하면 우리가 누리게 될 권리를 주기싫은 거겠지. L의 대답을 들은 J가 금세 보기 싫은 얼굴이 되었다.

J의 표정을 확인한 L이 말을 덧붙였다. 그냥, 우리가 행복한 게 싫은가봐. 동성애자끼리 잘 사는 게 싫은 거지. 따지고 보면 법에서 바라보는 사회는 개인이 행복한 걸 참 싫어하지 않아?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사는 것도 싫어하고, 젊은 부부가 편하게 아이를 양육하는 것도 아니꼬워하는 듯하고 말이야. 사람들은 저마다 본인이 행복하길 바라면서도 사회라는 자아를 쓰기만 하면 개인이 힘들게 살길 더 원하는 거 같아. 남들이 불행하게 산다고 자신에게 이익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럴까.

J는 흑당 버블티를 빨대로 휘휘 저으면서 말했다. 대만 카스테라, 대만 샌드위치, 대만 밀크티…. 온갖 대만산 것들이 유행하는데 이제는 동성결혼이 들어와야 할 차례가 아닐까? 만날 먹는 것만 들여놓지 말고. L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대만산이 유행이라도 그것까진 힘들 것 같네. 한숨과 침묵이 잠시 스쳤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J가 말을 꺼냈다. 결혼이 힘들면 이혼은 어때? L이 말했다. 결혼도 안된다는 판에 이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J가 말했다. 동성애자가 행복을 누리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다면 이성애자들의 불행이라도 법적으로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거지! 이쪽이라면 사회적 합의도 좀더 쉽지 않겠어? L이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듣고 보니 그렇네. J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동성이혼이 법제화되면 또 누가 알아? 동성애자의 불행에 동의하는 이혼한 이성애자들이 동성결혼을 찬성하게 될지?

L은 J에게 얼마 전 싱가포르의 국부라는 고 리콴유 전 총리의 손자가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가서 동성 결혼식을 올렸다는 뉴스를 말해주었다. L의 이야기를 듣고 J가 말했다. 그래, 우리가 먼저 동성이혼을 합법화하면 동성이혼을 원하는 아시아 셀럽들이 멀리 안 가고 한국으로 올지도 몰라.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경제효과도 상당하지 않겠어? J는 문득 마시고 있는 버블티가 너무 달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하루하루가 쓰디쓴데, 이 정도 달콤함은 괜찮지, 균형감 차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