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죽음과 마주하기
2020-02-05
글 : 정소연 (SF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나는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잘 보지 못한다.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다. 대부분의 픽션이 이에 해당한다. 이야기가 생사를 다루는 것은 어찌할 수 없을지 모른다. 생사는 중요한 화두니까. 당장 이렇게 말하는 나만 해도 죽음을 다룬 소설을 몇 편 썼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죽음을 꺼린다. 죽음에 대한 묘사를 꺼리고, 불필요한 죽음을 꺼린다. 영상물을 볼 때 이는 극에 달해, 나는 조연이나 단역이 많이 죽는 영화는 아예 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제대로 존재하지도 못하다 몇초 만에 소멸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많은 세계가 죽는 것 같아 괴롭다. 주요 등장인물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도 싫어한다. 어떤 영화나 소설이 새드엔딩일 것 같으면 스포일러를 꼭 미리 찾아보고, 아예 보지 않거나, 전반부를 조금 보고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기 전에 멈춘다. 내가 추리소설 독자일 수 있는 것은 아마 많은 고전 추리소설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는 지방검찰청에 기록을 열람하러 갔다. 출장을 갔다. 사망사건이라 수사기록은 죽음으로 가득했다. 죽음의 징조들, 죽음에 대한 저항, 한 사람이 ‘변사체’가 된 다음 시작된 수사. 왜 죽었는지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반복해 묻고 답하는 조서들. 그사이 시신은 부패해갔다. 나는 시신을 직접 보기도 했고, 검안 사진이나 부검 보고서, 사망 현장 영상 등을 때때로 본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변호사에게는 드문 일 또한 아니다. 어떤 이의 부검 보고서를 보고, 이어 그 사람이 살아 움직인 CCTV영상 한달치를 본 적도 있다. 초과근로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부패의 과정이 고스란히 남은 기록은 처음이었다. 장례를 일찍 치르거나, 장례 절차는 미루더라도 사망 후 보존까지 기간이 짧으면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는데, 안타깝게도 둘 다 아니었다. 함께 기록을 확인하러 간 동료 변호사는 토할 것 같다며 여러 번 화장실을 다녀왔다.

생명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생명이 깃들었던 육체 또한 순식간에 부패한다. 여기에는 묘사가 필요 없다. 기록은 날것이다. 요새는 카메라도 성능이 좋다. 나는 사람 눈알이 있던 자리와 눈을 마주치고 깜짝 놀란 다음, 토하지도 나가지도 않고 한산한 민원실 구석 열람복사전용 복사기로 열심히 복사를 했다. 검찰청이 문을 닫는 오후 6시 전에 일을 끝내고 당일 서울로 돌아오고 싶었다. 나는 어째서 이 모든 죽음을 그냥 볼 수 있는 걸까? 변호사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는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 변호사가 이렇게 구체적인 사망 기록을 보기도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지만, 알고도 금세 괜찮아졌다. 변호사가 되기 전에도 사람이 죽는 이야기를 보지 못했고. 종교가 없기 때문일까? 천국도 환생도 믿지 않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현실적인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원래부터 지극히 물질적인 존재다. 숨이 멎는 순간부터 다만 부패할 뿐인. 이날 저녁 나는 당일 서울로 돌아와, 곤드레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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