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로부터]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기
2020-03-18
글 : 오혜진 (문화연구자)
일러스트레이션 : 다나 (일러스트레이션)

3월이 된 지 아흐레가 지났지만, 아직 새 학기 학생들을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의 대학들이 개강을 1~2주 이상 늦췄고, 그마저도 한달간 온라인 강좌로 대체하라는 공지가 있었다. 학교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프로그램을 이용해 강사가 알아서 강의 동영상을 만들라고 안내했는데,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을 떠올리며, 그리고 앞으로 한 학기 동안 수업이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도 짐작하지 못한 채, 누추한 집에서 청중 한명 없이 홀로 100분간 한 학기 강의 계획을 떠들었다.

나는 화면에 나온 내 얼굴이 부끄럽기도 했고, 청중 반응 하나 살피지 못한 채 혼자 떠들어야 하는 이 상황에 거듭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와서, 고약한 숙제를 해치우듯 조악한 동영상 한편을 후다닥 업로드했다. 이런 걸로 수업이 될지 미심쩍었고, 이게 다 강의 동영상 시장을 활용해 강사 고용을 최소화하려는 신자유주의 대학들의 큰 그림인가 싶어 아찔했다.‘코로나19’ 시대의 침울한풍경은 어디서든 발견된다. 주변 강사·연구자·출판인들은 생업 중단의 위기를 맞자 불안해졌다. 대중 강의가 줄줄이 취소되자 강의노동자들의 월수입은 0에 수렴했고,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책을 펴낸 필자와 편집자들은 한숨지었다. 나 역시 확진자의 동선과 내 동선이 겹치지 않는지 알아내고자 촉수를 곤두세웠고, 내게 할당된 마스크 구입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예민해졌다. 번화하던 광화문과 안국동 거리는 텅 비었다.

유례없는 재난이므로, ‘촌극’처럼 보이는 이 시간을 시행착오로 여기며 의연하고 관대하게 견디자, 라는 현자들의 충언은 옳을 것이다. 다만, 코로나19에 혼을 빼앗긴 요 몇주의 시간은 내 안의 보신주의와 시민성의 실종을 의식하게 했다. 강사 얼굴 1/4과 강의자료만 화면에 띄운 채 오직 목소리로만 진행되는 동영상을 만들면서, 나는 ‘듣는 것’만으로는 정보를 숙지하기 어려운 청각장애인 학생의 존재를 깊이 생각지 못했다. 나와 지인들의 생계는 깊이 걱정했지만, 이동권과 정보권을 박탈 당한 채 한 건물에서 감염을 피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으리라는 점도 뒤늦게야 깨우쳤다. 자신의 안전을 염려해 ‘사회적 거리두기’를 택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이 사회가 굴러가도록 하기 위해 끊임없이 대신 ‘이동’해야 하는 배달노동자들의 안위도 한참 후에야 시야에 들어왔다.

유학·무역·이민·입양·여행 등 온갖 ‘이동’을 촉발하고 그것에 의해 지탱되는 것이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원리다. 그렇다면 이 ‘이동(성)’이 곧 감염의 경로이자 공멸·공생의 네트워크가 되는 것도 피치 못할 사실일 거다. 나는 내 삶이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하염없이 느려지는 이 사회의 속도를 실감했지만, 그건 이미 어딘가에는 훨씬 더 먼저 멈춰진 누군가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는 언젠가 사그라들 테고, 사회에 큰 재난이 닥친 후에는 언제나 그랬듯 ‘복구’와‘재건’의 에너지, ‘정상화’에의 압박이 거세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경험한 이 ‘멈춤’의 의미를 그때에도 기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