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버마 스프링 21' 미얀마 민주주의의 날 영화 크레딧을 공개하는 그날을 꿈꾸며
2021-06-24
글 : 김성훈
미얀마 민주화 운동 기록한 단편영화 <버마 스프링 21> 제작한 미얀마 영화인 웨이 마르 뉸과 요한나 후트

참담함의 연속이다. 군부 쿠데타와 헌정 질서 파괴에 저항하는 미얀마 민주화 운동이 벌써 다섯달째 접어들었다.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한 군부는 어린아이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많은 민간인을 반체제 인사로 규정해 체포하는 등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잔혹한 살상과 폭력을 저지르고 있다. 지난 5개월 동안 85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고, 5900명 이상이 체포됐다고 한다. 명백히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행위임에도 유엔과 국제사회가 우려만 표명하고 있는 암흑의 상황에서 힘겹게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미얀마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영화 한편이 뒤늦게 알려졌다.

미얀마 영화인 11명과 아티스트 49명이 함께 만든 <버마 스프링 21>(Burma Spring 21)로, 지난 2월 27일 유튜브, 비메오, 페이스북에서 공개됐다. 약 60명의 미얀마 문화예술인들을 한자리에 모은 이는 단 두명이다. 미얀마 랑군필름스쿨(YFS) 배급 담당자이자 유럽에서 활동 중인 다큐멘터리 감독 요한나 후트와 미얀마 양곤에서 나고 자랐고 랑군필름스쿨에서 영화를 공부한 뒤 체코로 건너가 영화와 순수예술을 전공한 웨이 마르 뉸 이다.

인터뷰에 나서기 쉽지 않은 상황임에도 웨이 마르 뉸과 요한나 후트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 더 많은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고, 미얀마의 상황을 알릴 수만 있다면 큰 두려움이 없다”라며 자신의 실명과 얼굴을 공개하는 데 선뜻 동의했다. <씨네21>은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미얀마영화 <개와 정승 사이>를 제작한 마아앵 프로듀서가 미얀마 군부에 체포된 지난 6월 8일과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6월 14일, 두 차례 줌을 통해 두 사람을 만나 미얀마 영화인들과 함께 <버마 스프링 21>을 제작한 사연을 들었다.

-영화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요한나 후트 지난 2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너무 무서웠고, 유럽에 있으면서 미얀마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속상했다. 웨이 마르 뉸을 만나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주고받았다.

웨이 마르 뉸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유럽에 있었지만 미얀마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재능을 어디든 쓰고 싶었다. 군부가 국가를 점령한 사건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요한나와 함께 미얀마 영화인 11명에게 ‘거리로 나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풍경, 마음속의 감정을 카메라에 담아 이곳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의 메일을 쓰기로 했다.

요한나 후트 당시 미얀마는 인터넷 환경이 열악해 미얀마 영화인이 그들이 찍은 영상을 어렵게 유럽으로 보냈고, 그 영상들을 확인해 편집했다.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정보나 그들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보안상 얘기할 수 없다.

웨이 마르 뉸 처음에는 미얀마 영화인들에게 ‘10~30초 길이의 짧은 영상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그들이 긴 영상을 많이 보내오면서 규모가 점점 더 커졌다. 누구도 저작권을 소유하지 않기로 원칙을 정한 덕분에 이 영화가 나올 수 있었다.

-미얀마에서 영화인들이 보내온 영상은 길이가 어느 정도 되나.

요한나 후트 5시간이 넘는다. 시위 현장에서 카메라를 들기 쉽지 않고, 파일 크기가 큰 영상을 인터넷으로 전송하기 어려운 환경임을 고려하면 생각보다 훨씬 긴 분량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힘겨운 노력 덕분에 영상이 무사히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웨이 마르 뉸과 요한나 후트(왼쪽부터)

-미얀마에서 온 영상을 처음 봤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나.

웨이 마르 뉸 뉴스를 통해 많은 시위 풍경을 접했지만 미얀마 영화인들이 찍어 보내준 영상만큼 강렬하고 생생하진 않았다. 그들이 보내온 영상은 시위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 들 만큼 현실감이 넘쳤고, 그게 뉴스 클립과 달랐던 점이다.

요한나 후트 일주일 동안 잠을 못 잤다. 매일 두 시간 이상 영상을 보면서 볼 때마다 시위 현장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베를린은 겨울이었고, 집 밖은 조용하고 평화로웠지만, 영상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잔혹한 이미지들을 볼 때마다 영화를 잘 만들어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됐다.

웨이 마르 뉸 쿠데타가 일어난 뒤 첫 두달은 일상이 무너지다시피했다. 미얀마에서 도착한 영상들을 아카이빙하면서 매일 고향 땅으로 가서 동료들과 카메라를 들고 싶었다. 유럽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위험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그들이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건 그들이 다큐멘터리스트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엄혹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버마 스프링 21>은 미얀마 시위 풍경과 손가락 세개가 그려진 일러스트레이션을 교차로 보여준다. 49명의 아티스트들이 직접 그린 손가락 세개는 모습이 다양했고, 손가락 숫자가 많아지면서 더욱 강렬했다.

웨이 마르 뉸 손가락 세개는 독재정치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잘 알다시피 영화 <헝거게임>에서 등장한 뒤로 타이, 홍콩에서 시민들이 손가락 세개를 들었다. 한 미술가 친구가 손가락 세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린 뒤 점점 더 많은 미술가가 참여했다. 일러스트레이션을 작업하는 과정이 시위 규모가 커지는 과정과 흡사했다.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수만큼 손가락도, 인종도, 종교도 다양해졌고, 그들이 합쳐져 컬러풀한 그림이 만들어졌다.

-5시간이 넘는 영상을 5분짜리로 편집하는 작업이 쉽진 않았을 것 같다.

요한나 후트 나 또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지만 다른 사람이 촬영한 영상을 편집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촬영한 사람들의 의도를 명확하게 알기 어려운 상황이라 편집 작업은 촬영한 사람이 무엇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했는지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편집 작업을 하면서 원칙이 하나 있었다면 목숨을 잃은 사람이나 잔혹한 장면은 배제하되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이 점점 더 강렬해지는 순간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시위가 시작되고, 어디선가 총소리가 들리고, 경찰이 등장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바람이 더욱 강렬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고, 편집은 그걸 찾는 과정이었다.

-이 작품에는 엔딩 크레딧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웨이 마르 뉸 시위 초반에는 참여한 영화인과 아티스트의 이름을 크레딧으로 표기하려고 했지만, 군부의 시위 진압이 폭력적으로 변하면서 이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넣지 않기로 했다.

-영화를 본 미얀마 시민들의 반응은 어떤가. 이 영화가 공개된 뒤 시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러면서 시위 상황이 더욱 심각해졌는데.

웨이 마르 뉸 많은 사람이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을 통해 알고 있지만 누가 봤는지 알 수 없어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이 영화가 시위에 참여하는 미얀마 시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건 분명한 것 같다.

요한나 후트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 가장 중요했던 건, 참여한 영화인과 아티스트가 서로를 믿었고, 좋은 우정을 나누는 사람들이며, 서로의 일을 존중한 덕분이다. 세 가지 태도가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그 어느 때보다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지 그리고 연대가 필요하다. 많은 한국인 또한 미얀마 시민들을 지지하고 있다.

웨이 마르 뉸 국제사회의 관심이나 지지보다는 전세계의 개개인이 각각 보여주는 연대 의식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사실 국제사회는 여러 현실적, 정치적 이유 때문에 미얀마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지원이나 지지를 해주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한국은 미얀마와 문화적인 교류가 많았고, 그 덕분에 미얀마 시민들은 1980년 5월 광주를 그린 <택시운전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힘든 투쟁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다. 최근 한국 사람들이 보내준 지지와 연대에 대해 무척 고마워하고 있다.

-최근 타이, 홍콩, 광주를 잇는 ‘밀크티 동맹’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에서 연대하고 있다.

웨이 마르 뉸 시대도 공간도 다르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하나로 모이는 연대의 움직임이 창조적이고, 지금 미얀마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밀크티 동맹의 공통점이라면 변화의 주체가 젊은 세대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시위 문화를 빠르게 전파하고 그 덕분에 전진할 수 있는 것 같다.

-<버마 스프링 21>에 참여한 영화인, 아티스트의 평균나이가 어떻게 되나.

웨이 마르 뉸 보통 30대 초중반의 젊은 세대들로 구성됐다.

-지난 민주화 시대가 미얀마의 영화 및 문화예술과 이 세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다고 보나.

웨이 마르 뉸 아웅산 수치가 집권했던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미얀마 사회는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다소 기복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가 전반적으로 성장하던 시절이었다. 영화는 여전히 검열이 존재했지만 문학과 음악은 검열이 폐지돼 표현이 자유로워졌다. 아웅산 수치 시절의 미얀마에서 가장 큰 변화는 영화제를 포함해 다양한 문화 행사, 프로그램들이 열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현재 젊은 세대들이 미얀마 시위에 앞장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한국영화계가 미얀마 영화인을 도우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

요한나 후트 영화인들간의 연대는 계속되어야 하고, 그것은 쿠데타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는 미얀마 사회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해 한국의 영화제들이 미얀마 영화인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앞으로도 특별 섹션을 신설해 미얀마영화가 계속 조명될 기회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웨이 마르 뉸 워크숍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던 시절, 군사독재정권하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촬영 소스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본으로 만들어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거나 다른 나라로 내보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 프로젝트는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적인 과정인지 직접 알려준 작품이다. 동료 영화인들의 작은 노력이 모여 하나의 영화가 완성됐다. 우리가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한국영화계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할 테니 메신저로서 <씨네21>이 많이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5개월째 접어든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서 <버마 스프링 21>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웨이 마르 뉸 60여명의 영화인, 아티스트가 참여함으로써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영화가 민주화 시위에 참여하는 많은 시민에게 작은 용기와 동기부여가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 물론 우리가 보상을 바라고 벌인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미얀마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할 계획인가.

웨이 마르 뉸 <버마 스프링 21>과 관련된 프로젝트도, 미얀마와 관련된 또 다른 프로젝트도 있다. (<버마 스프링 21>의 속편을 볼 수 있을까, 라는 기자의 질문에) 속편 제작을 원하고 가능성이 있지만 아직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바람이 있다면.

웨이 마르 뉸 이 영화의 크레딧이 공개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날이 바로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실현된 날일 것이다.

-미얀마에 정말로 봄이 올 수 있을까.

웨이 마르 뉸 슈어, 예스! 당연히 봄이 올 것이다. 일상을 살다보면 괴로운 일도, 우울한 일도,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도 생기지만 크게 보면 언젠가는 봄이 온다. 지금은 미얀마 시민들이 억압을 받고 있지만 그 또한 자유를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버마 스프링 21>은 어떤 영화?

러닝타임이 5분 남짓한 이 영화는 크게 미얀마 영화인 11명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시위 현장에서 찍은 영상들과 아티스트 49명이 직접 그린 손가락 세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교차로 보여주며 전개된다. 처음에는 딴봉띠(자신의 집에서 냄비를 두드리며 시위하는 미얀마 문화.-편집자) 집회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은 군부가 쏘아올린 총소리 이후 많은 사람을 거리로 이끌어낸다. 손가락 세개의 일러스트레이션 숫자도 덩달아 많아지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미얀마 사회의 열망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유튜브와 비메오에서 감상할 수 있다.

사진제공 웨이 마르 뉸, 요한나 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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