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마인> <파친코> 작가, <굿 닥터> 제작자가 말하는 한국과 미국에서 시리즈를 만드는 법
2021-09-28
글 : 김성훈
<마인> 백미경 작가,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 쇼러너 허수진 작가, 미국 <굿 닥터> 시리즈를 제작한 이동훈 엔터미디어 콘텐츠 대표

"예산이 늘어난 만큼 드라마는 대범해지고, 영화처럼 보이길 원한다"

김성훈 <씨네21> 기자, 백미경 작가, 허수진 작가(왼쪽부터).

한국과 미국의 드라마 작가는 작업 방식이 어떻게 다를까. 작가에게 자율권은 얼마나 주어질까. 한국 드라마를 미국에서 리메이크하려면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 코로나19 이후 국내외 OTT 플랫폼이 급성장하고, 그로 인해 ‘K드라마’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현재, 드라마 작가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9월 6일부터 10일까지 온라인과 상암동 일대에서 열리고 있는 2021 국제방송영상마켓(BCWW,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한국콘텐츠진흥원)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 다큐멘터리, 영화 등 K콘텐츠의 매력과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야심찬 행사였다.

그중에서 지난 9월 8일 오전 상암동 YTN과 온라인에서 공개된 콘퍼런스 ‘한국과 미국의 작가(쇼러너)가 말하는 드라마, 시리즈를 만드는 법’에서 최근 많은 인기를 끌며 종영한 드라마 <마인>의 백미경 작가,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의 쇼러너 허수진 작가, 미국 간판 드라마 <굿 닥터> 시리즈를 제작한 이동훈 엔터미디어 콘텐츠 대표가 참석해 자신의 제작 방식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이들의 대화를 7가지 키워드로 재구성했다.

백미경

2014년 SBS 드라마 단막극 <강구 이야기>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해 2015년 첫 장편 <사랑하는 은동아>의 각본을 썼다. 이후 <힘쎈여자 도봉순> <품위 있는 그녀> <우리가 만난 기적> <날 녹여주오> <마인> 등 여러 인기 드라마의 각본을 쓴 작가이자 자신의 제작사인 MK콘텐츠를 운영하는 제작자다.

이동훈

엔터미디어 콘텐츠 대표. 한국 드라마 <슈츠>, 간판 드라마 <굿 닥터> 시리즈 등 여러 드라마를 제작했고, 애플TV+ 창립작인 <파친코> 공동 수석 프로듀서를 맡았다. 현재 한국계 작가 라나 조의 훌루 드라마 <아메리칸 소울>을 준비하고 있고, 미국 드라마 <굿 플레이스>를 한국 드라마로 리메이크하는 작업을 하는 등 여러 프로젝트를 기획, 개발하고 있다.

허수진

폭스 텔레비전 스튜디오 시리즈 <킬링>으로 작가 경력을 시작한 뒤 시리즈 <더 위스퍼스>, 리들리 스콧이 제작한 시리즈 <더 테러> 시즌1 등 여러 시리즈에서 원작 소설을 각색했다. 애플TV+ 창립작 <파친코>의 쇼러너.

1. 한국의 드라마 작가와 미국의 쇼러너가 하는 일

한국의 메인 작가와 미국의 쇼러너는 역할이 다소 다르다. “드라마의 모든 에피소드를 혼자서 집필하는 한국”(백미경)과 달리 미국의 쇼러너에게는 그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이 주어진”다. 미국에서 쇼러너는 한마디로 “크리에이터인 동시에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허수진)다. “작가방을 이끌고 대본 집필뿐만 아니라 스튜디오로부터 받은 제작비를 운용한다. 배우 및 감독 캐스팅, 제작진 세팅, 제작 관리 등 제작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총괄한다”라는 게 허수진 작가의 설명이다.

미국에서 “영화를 감독의 매체, 드라마를 작가의 매체”(이동훈)라고 부르는 것도 그래서다. 최근 OTT 플랫폼의 시리즈 제작이 늘어나면서 한국도 미국과 비슷한 시스템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고 한다. “여전히 공중파 드라마는 작가가 16부작이든 20부작이든 모든 에피소드를 직접 쓰기 때문에 캐스팅을 포함한 제작에 관여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OTT에서 제작되는 시리즈의 경우 에피소드마다 러닝타임이 기존 드라마에 비해 짧기 때문에 작가가 제작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백미경)고 한다.

2. 작가와 제작진은 어떻게 협업하는가

<굿 닥터> 사진제공 SONY PICTURES TELEVISION COPYRIGHTS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를 만들려면 작가와 제작진간의 유기적인 협업이 관건이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메인 작가 혼자서 모든 에피소드를 집필하는 한국의 경우, “작가의 대본 집필에 대한 경쟁력이 높아지는 장점이 있지만 현장 컨트롤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단점”(백미경)도 발생한다.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난 촬영과 편집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것도 그래서”(백미경)다.

미국에서는 쇼러너나 에피소드를 집필한 작가가 촬영 현장에 상주해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변수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게 주요 업무 중 하나다. “가령 로케이션 섭외가 불발되거나 예산을 감축해야 할 상황이 생기면 대본을 수정해야 한다. 현장에서 배우가 대사 수정을 요구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감독은 대본을 수정할 권한이 원칙적으로 없기 때문에 현장에서 작가가 쇼러너와 감독 사이에서 커뮤니케이션하며 대처하는 것”이라는 게 허수진 작가의 설명이다. 최근 OTT 시리즈 제작이 늘어나면서 작가와 감독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과거에는 현장에서 감독의 영향력이 크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점점 커지는 추세”(허수진)다. 다만 “감독이 에피소드 대부분을 연출하는 과거와 달리 에피소드 한두개만 찍는 경우가 많아 쇼러너에게 더 많은 책임과 권한이 주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동훈)이다.

3.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의 역할

소설 <파친코>

보통 미국 드라마에서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EP, Executive Producer)는 ‘대본을 쓰는 EP’(Writing EP)와 ‘대본을 쓰지 않는 EP’(Non Writing EP)로 구분된다. 같은 EP라도 허수진 작가는 전자, 이동훈 대표는 후자인 셈이다. Writing EP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쇼러너에 해당한다. Non Writing EP의 주요 업무는 아이템 기획 및 개발, 방송사 피칭 등에 집중되어 있다. Writing EP가 쇼러너만큼 현장에서 많은 권한을 가진 건 아니지만 쇼러너가 대본 집필과 제작 진행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건 Non Writing EP가 차별화된 아이템을 기획, 개발하고 방송사를 상대로 한 피칭에 성공한 덕분이다. 드라마가 시리즈 제작이 확정되는 본궤도에 오르려면 두 역할 모두 완벽해야 한다.

4. 할리우드 작가방의 작업 환경

쇼러너가 지휘하는 작가방은 적게는 예닐곱, 많게는 15명의 작가로 구성된다. 이들은 시즌의 방향을 정하고 꼼꼼하게 취재하며 자료를 조사해 각 에피소드의 대본을 쓴 뒤 정해진 시간 안에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돕는다. 허수진 작가가 “폭스 텔레비전 스튜디오 시리즈 <킬링>(2011)으로 작가 경력을 처음 시작했던 10년 전보다 지금은 작가방의 작업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작가방 업무가 체계적으로 운용됐다. ‘베이비 작가’부터 ‘퍼스트 작가’까지 경력에 따라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됐다. 경력이 쌓이면 에피소드 한편씩 할당받는다. 쇼러너가 내 대본을 읽고 피드백이 적힌 메모를 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최근 OTT간 시리즈 제작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러면서 미국의 드라마 제작비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 예산이 늘어나는 건 장점이 있는 동시에 단점도 있다. “예산이 늘어난 만큼 드라마는 대범해지고, 많은 사람은 TV가 TV처럼 보이길 원하지 않고 영화처럼 보이길 원한다.”(허수진) OTT 시리즈 제작은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운용되는 작가방의 시스템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OTT 시리즈의 제작 기간이 짧아지면서 대본을 집필하는 데 주어지는 시간 또한 덩달아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작가들이 대본 마감 시간에 쫓겨 촬영 현장에 나갈 여유가 없어졌다. “작가방의 규모가 갈수록 작아지고, 과거보다 많은 업무가 작가에게 주어지며, 이러한 변화는 장기적으로 젊은 작가들이 훈련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데 영향을 끼쳤다”라는 게 허수진 작가의 설명이다.

5. 리메이크할 때 가장 신경 써야 할 일은

<마인> 사진제공 CJ ENM

K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면서 리메이크 움직임도 늘고 있다. “<마인> <힘쎈여자 도봉순> 등 전작 대부분 미국에서 리메이크 제안을 받았다”(백미경)고 한다. 하지만 미국 드라마 <슈츠>를 한국에서 리메이크했고, 미국 시리즈 <굿 플레이스>를 한국 드라마로 기획·개발하고 있는 이동훈 대표는 “시리즈 제작까지 수많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현재 시즌5 제작을 앞둔 간판 드라마인 <굿 닥터> 시리즈 또한 방송사 피칭부터 파일럿 제작까지 무려 4년이 걸렸다. 한국 드라마를 미국 드라마로 리메이크하려면 미국 방송국이나 글로벌 OTT에 수요가 있는지 파악하는 게 먼저다.

작품을 미국 문화에 맞게 각색할 줄 아는 미국 작가를 찾는 것도 과제다. “작가가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미국 정서에 맞는 세계관을 새로 구축해야 하는 데다가 대본을 완성하면 방송국을 돌아다니며 피칭을 해야 한다. 피칭에 성공해도 곧바로 시리즈 제작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파일 럿이 성공해야 방송사가 시리즈 제작을 고려한다. 이처럼 시리즈 제작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는 게 이동훈 대표의 설명이다. 한국 콘텐츠를 리메이크할 때 “미국 제작자가 원작자의 저작권(All Right)과 권한을 요구하는데 그 협상을 얼마나 잘 끌어내는가에 리메이크의 성패가 갈린”(허수진)다. 백미경 작가는 “미국 제작사의 리메이크 작업에 원작자인 나도 당연히 참여한다. 인상적인 것은 미국은 작가로서 내 의견을 많이 궁금해하고, 작가의 저작권과 창작 권한을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들로선 작품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해야 하는 게 관건이니까”라고 전했다.

6. 한국과 미국에서 작가가 되는 법

이날 대담에서 작가 지망생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질문은 한국과 미국에서 작가가 되려면 어떤 경로를 거쳐야 하는가였다. “K콘텐츠 파워가 커진 현재 드라마 산업 상황에서 신인 작가의 끊임없는 등장이 중요한 때”(백미경)다. 백미경 작가가 작가 경력을 시작한 계기는 다소 특별하다. MBC 프로덕션 영화 시나리오 공모 우수상, SBS 극본공모전 대상, MBC 극본공모 미니시리즈 부문 우수상 등 세 군데 공모전에서 수상하면서 작가가 된 경우다. “보조 작가로 경력을 시작하든 공모전에 도전하든 누구든지 투지를 가지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게 중요하다. 요즘은 좋은 아이템을 찾는 제작사가 많기 때문이다.”(백미경)

미국 또한 작가가 되려면 많은 진입 장벽을 거쳐야 한다. 에이전트를 구해 쇼러너로부터 선택받는 게 중요하다. 허수진 작가는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질문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한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가 서로를 카피하기 바쁘다. 쇼러너로서 나는 유니크하고 독창적인 이야기를 쓰는 사람을 찾는다. 규칙이나 틀을 깨뜨릴 줄 아는 사람을 내 작가방의 일원으로 선택”(허수진)한다. 작가가 된 경로도, 미국과 한국의 산업 환경도 각기 다르지만, 백미경, 허수진 두 작가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고 싶은 이야기,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7. 드라마 서사의 트렌드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굿 닥터> 사진제공 SONY PICTURES TELEVISION COPYRIGH

작품에서 맡은 역할도, 활동하는 무대도 다르지만 백미경, 이동훈, 허수진 세 사람이 만든 드라마의 공통점은 모두 여성(<마인> <파친코>), 사회적 약자(<굿 닥터>) 등 다양성(<굿 닥터> <파친코> <마인>)의 가치를 다룬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최근 할리우드와 한국에서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과 무관하지 않다. 이동훈 대표는 “할리우드에서 부는 변화의 바람 덕분에 자신감이 좀더 생겼달까”라며 “현재 한국계 시나리오작가인 라나 조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입양아의 이야기를 다루는 훌루 오리지널 드라마 <아메리칸 소울>을 준비하고 있다. 10년 전이었다면 힘을 좀더 길러서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자신 있게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 분위기”라고 전했다.

허수진 작가는 “할리우드가 다양한 의견을 듣는 원인 중 하나가 여성과 유색인종의 경제력이 좋아진 것도 있다”라며 “수십년 동안 백인 남성이 여성을 구하는 서사가 반복되다 보니 관객으로선 새로운 이야기에 목이 마른 것 같다. 유색인종인 우리 또한 불편한 진실이나 과거와 다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백미경 작가는 “<마인> <품위 있는 그녀> <힘쎈여자 도봉순> 등 여성 서사를 주로 기획하고, 각본을 쓴 작가로서 굉장히 벅차고 중요한 질문”이라며 “<힘쎈여자 도봉순>이 성공했는데도 <품위 있는 그녀>가 두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라는 이유만으로 투자받기 어려웠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여성 서사가 많이 나오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고 뿌듯하다”라고 말했다.

사진제공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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