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를 향한 반응은 대체로 저널리즘 윤리를 끌고 들어온다. <9월 5일: 위험한 특종>(이하 <9월 5일>)은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맥락 역시 중요한 영화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미디어 환경을 대입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ABC사 스포츠 중계팀은 저널리스트보다 콘텐츠 크리에이터와 더 닮았다. 이들은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사건을 서사로 치부하며 드라마화한다. 사실을 엄정하게 전달하는 뉴스 브로드캐스팅 대신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현장을 카메라로 생중계한다는 내용은 현대의 포노 사피엔스를 다룬 이야기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또 <9월 5일>은 현대 스릴러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디지털 신인류의 재현 양상의 한계를 환기한다. 그러니 이 영화가 저널리즘 윤리로 귀결되는 결론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전세계 최초의 테러 생중계라는 오명의 역사는 곧 현대 장르영화에서 무분별하게 반복되는 포노 사피엔스와 그 재현 행위를 돌아보게 만든다.
포노 사피엔스의 영화적 재현
우선 주목하게 되는 건 인물을 대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9월 5일>은 스포츠 중계팀의 저급한 연출 의도를 보여주면서도 인물과 거리를 두는 방식을 사용한다. 카메라는 대체로 이들의 업무 현장을 지켜보는 처지에 있다. 때로 중대한 결정을 하는 인물의 얼굴 가까이에 밀착하지만 그게 얼마나 비윤리적이든 다른 인물의 반응숏은 최대한 생략해 관객에게 가치판단을 유보시킨다. 그런데도 룬(피터 사스가드)은 악인으로 분류될 여지가 가장 높은 인물이다. 그는 스포츠를 중계할 땐 패자의 드라마에 집착하고 테러 인질극을 중계할 땐 인질의 서사에 치중한다. 룬은 앞을 알 수 없는 사건을 즉흥적으로 다루며 사건이 비극을 맞이할 때를 대비한 자극적인 서사를 연출하는 자다. 신임 프로듀서 제프(존 마가로)에게 룬이 악한 멘토라면 마브(벤 채플린)는 선한 멘토다. 이들 모두는 자신이 만들어낸 영상의 화면을 들여다보며 그것에 반응한다. 저마다 리액션을 하는 그들에게서 콘텐츠를 만들며 소비하고 피드백을 보내는 현대의 프로컨슈머와 능동적 관객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주요한 점은 <9월 5일>에서 영상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더라도 정작 ABC사 스포츠팀이 생중계한 테러의 현장은 재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이 영화가 사건과 인물을 대하는 자세는 작품 속의 스포츠 저널리스트와 정반대다.
무엇이든 찍고 그것을 볼 수 있는 화면 앞에 앉은 <9월 5일>의 스포츠 중계팀이 환기하는 현대 영화의 포노 사피엔스란 스마트폰을 신체의 연장된 일부처럼 사용하는 디지털 신인류다. 특히 스릴러 장르에서 스마트폰의 활용 여부에 따라 전개 속도와 긴장은 전혀 다르게 펼쳐진다. <트랩>과 <스픽 노 이블>이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만 마치 다른 시대의 이야기처럼 체감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전자는 주인공이 SNS 라이브를 이용해 위기를 타개한다면 후자는 어떤 상황이 와도 스마트폰은 없을 듯한 장소로 그려지고 있어서다. 하지만 한국 장르영화에서 유난히 적극적으로 반영되는 디지털 시대 인간상의 반복된 묘사는 서사적 기능과 의미화를 거치기보다 현상 그 자체로 등장하는 추세다. 이들은 카메라를 들고 나타나 촬영하고 영상이 주는 자극에 과몰입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적극 리액션한다.
디지털 기기에 친숙하고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정보에 몰입하는 포노 사피엔스의 영화적 재현은 서사를 움직이는 주기능보다 부기능에 가까웠지만 근래 들어 이를 서사의 중심에 두는 경향도 보인다. <베테랑> 시리즈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1편의 형사 서도철에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는 경찰 공무원의 폭행을 감사하고 고발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이때 군중이 폭력을 촬영하는 행위는 시민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다. 폭력의 잔재를 일부 답습하던 서도철 형사에게 촬영 행위는 경찰 공무원에게 더해진 시대적 고충으로 그려졌었다. <베테랑2>는 서도철의 적대자와 주변 인물에 더 본격적으로 디지털 환경을 심어놓은 후 서사를 전개했고, <드라이브>는 자신이 납치된 상황을 스트리밍으로 생중계해야 하는 인플루언서를 중심에 둔다.
문제 삼고 싶은 지점은 한국의 장르영화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패턴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부정성이다.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인증 사진을 찍거나 조회수에 연연하는 디지털 신인류는 무지성을 대변하는 이미지에 거의 고착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이하다. 이들은 사실성을 극대화하거나 영화의 전체 서사와 동떨어진 부정의 감흥을 일으키려는 목적에서 등장하는 것만 같다. 이때 완전히 간과되는 것은 영화에서 지나치게 반복 재현되는 라이브 스트리밍의 이미지가 지닌 무지성이다.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라이브방송과 영상통화의 거대 이미지는 현실을 족히 뛰어넘는 비현실성으로 다가온다. 이보다 더 좋지 않은 경우는 영상에 반응하는 실시간 텍스트를 재현하는 장면이다. 이는 영화 매체가 시대적 현상에 매몰된 나머지 영화의 미학을 저버린 경우로 보이기까지 한다. 어디서든 카메라를 들어 프레임 안에 자신을 드러내는 이 신인류는 막상 그들을 등장시킨 영화 안에서 서사화되지 못하고 피상적인 재현으로만 남아 맥거핀으로 소비되기에 이른다. 오컬트영화 <사흘>의 장례식장에서 인증 사진을 찍는 인물을 유의미하게 포착하면서도 정작 그 행위가 다음에 나올 어떤 서사 기능과도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유효한 예시다. 애초에 의미가 태어난 적 없는 현상의 재현 방식을 숙고해볼 시점은 언제가 될까.
실제 사건의 재현과 단절하다
다시 상기하고 싶은 것은 <9월 5일>은 어쩌면 이 영화에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실제 사건의 재현과 과감하게 단절했다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테러를 생중계했던 방송사의 직원과 그들의 선택을 스튜디오 안에서 충실하게 재현하는 대신 생중계되었던 테러리즘 자체의 재현은 생략하며 시각 매체의 책임을 통감한다. <9월 5일>에 드러난 생중계의 역사는 이후 테러리스트 집단이 중계를 이용하도록 만들었고, 그러한 사실은 다시 미국영화의 첩보물과 액션영화의 홈비디오 화면 속에서 복면을 쓰고 잔혹 행위를 저지르는 익숙한 재현 이미지를 양산해냈다. 그러니 <9월 5일>이 드러낸 것과 감춘 것 사이에는 영화가 무엇을 재현하고 재현하지 않을지를 가른 현명한 취사선택이 있다. 활성 상태로 켜져 있는 화면이라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생중계의 재현을 끊어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보고 보이는 매체로서의 고민을 영리하게 풀어낸다. 이 영화가 만약 누군가를 향해 의무와 책임 의식을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것은 디지털 세계를 익숙하게 유영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장르영화에서 재현과 복제를 반복하는 무지성의 포노 사피엔스는 만드는 자와 소비하는 자 둘 중 대체 누구를 비추는 거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