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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훈의 영화의 검은 구멍] 몰입적인 영화 제작 환경 구축하기, 디지털 시각효과를 활용한 세계-만들기(3편)
한 눈에 보는 AI 요약
영화 제작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몰입감을 높이기 위해 디지털 기술이 적극 활용되고 있다. 존 패브로 감독은 <정글북>과 <라이온 킹>, <만달로리안>을 통해 버추얼 프로덕션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확장했다. 이를 통해 영화 제작 환경은 협업적이고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으며, 가상 세계와 현실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1. 영화 제작의 불안과 사전 시각화
    1. 영화 제작자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공존시킴
    2.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스토리보드 대신 3D 애니메이션을 활용한 사전 시각화가 일반화
    3. 사전 시각화는 제작 상의 불안 요소를 줄이고, 제작진이 영화 속 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도록 도움
  2. 존 패브로와 버추얼 프로덕션의 도입
    1. 존 패브로는 몰입적인 제작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감독
    2. <아이언맨> 시리즈로 이름을 알리고, <정글북>과 <라이온 킹>에서 버추얼 프로덕션을 실험
    3. 버추얼 프로덕션은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결합하여 실사와 가상을 실시간으로 합성
    4. 이 방식은 영화 제작 방식을 동시적, 협업적, 비선형적으로 변화시킴
  3. <정글북>의 제작과 한계
    1. 실사 애니메이션인 <정글북>은 주인공 외 모든 요소를 컴퓨터로 구현
    2. 현실감을 위해 인도 현지에서 촬영한 수십만 장의 사진을 3D 환경으로 재현
    3. 배우는 블루스크린 환경에서 고립된 채 연기해야 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장치들이 도입되었지만 한계 존재
  4. <라이온 킹>에서의 몰입 환경 구축
    1. 전체가 CG로 구성된 <라이온 킹>은 고독한 연기의 문제에서 자유로움
    2. 게임엔진과 가상현실 기술을 통해 아프리카 초원을 구현하고, 스태프들이 가상 세계에서 직접 촬영 요소를 조율
    3. 가상 환경과 제작 현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새로운 제작 방식 시도
  5. <만달로리안>과 LED 월의 활용
    1. 존 패브로는 <라이온 킹> 이후 가상현실 대신 6m 높이, 22m 너비의 LED 월을 활용
    2. <만달로리안>의 첫 장면은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기술적 성과를 보여줌
    3. 현대 영화 제작은 가상을 매개로 하며, 기술이 만든 세계에 진정성을 부여하게 됨

영화 만들기에 뛰어든 사람들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산다. 여타의 창작 행위가 그러하듯 영화 만드는 사람 또한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시행착오를 겪는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는 아직 볼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로 인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느끼면서 살아간다.

완성되기 이전의 영화는 창작자의 관념 속에 존재한다. 최종 결과물의 밑그림에 해당하는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는 창작자만 알고 있던 상상의 영화에 뼈와 살을 입혀 영화제작에 참여하는 여러 스태프에게 공유된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함께 시나리오를 시각화하는 작업은 스토리보드가 아닌 3D애니메이션이 대체했다. 사전시각화(previsualization)로 불리는 이 작업은 영화의 부분 또는 전체를 3D애니메이션으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이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의 부분 또는 전체를 미리 보여주는 이 작업의 분명한 장점은 제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물리적, 경제적, 심리적 불안 요소를 줄이고 제작 현장에 참여한 이들이 영화 속 세계와 상호작용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존 패브로는 영화 관객에게 몰입적인 관람 환경이 중요한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도 몰입적인 제작 환경이 중요하다고 믿은 영화감독 중 한명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영화배우, 영화 각본가, 영화감독으로 일했던 그는 <아이언맨>(2008)과 <아이언맨2>(2010)의 연출을 맡으면서 세간에 이름을 알렸다. 일부 관객들은 그를 아이언맨의 비서인 해피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로 기억하기도 한다. 존 패브로는 실사영화의 사실주의적인 양식을 모방한 애니메이션 <정글북>(2016)과 <라이온 킹>(2019)을 연출하는 과정에서 당시로서는 미개척 분야였던 버추얼 프로덕션(virtual production)을 부분적으로 시도했다. 버추얼 프로덕션이란 3D애니메이션, 모션 캡처, 포토그래메트리(photogrammetry), 가상 카메라, 게임엔진, 가상현실(VR), LED 월 등의 최신 디지털 기술을 병렬적으로 결합하여 스튜디오에서 실사 이미지와 가상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합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포스트프로덕션에서 완성하거나 수정해야 할 것들을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미리 결정하거나 촬영 현장에서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실시간으로 협업해서 처리하는 방식을 따른다. 예를 들어 디지털이미지의 생성과 합성은 포스트프로덕션이 아니라 프리프로덕션에서 대부분 결정되는 식이다. 따라서 버추얼 프로덕션은 기존의 순차적, 분업적, 일회적, 선형적 제작 방식을 동시적, 협업적, 반복적, 비선형적 제작 방식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정글북>

존 패브로에게 <정글북>은 버추얼 프로덕션의 필요성을 일깨워준 작품이다. 실사 애니메이션으로 분류되는 이 작품은 주인공 모글리를 제외한 영화 속 모든 대상을 컴퓨터로 처리한 것이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인도의 정글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을 포토리얼리즘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인도 현지의 40여곳을 탐방해서 촬영한 수십만장의 사진을 활용했다. 그리고 현지에서 스캔한 사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3D 환경을 만들었다. 하지만 모글리를 연기한 닐 세티는 작품 속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연기하지 못했다. <정글북>의 모글리는 야생동물들과 함께 정글 숲속을 뛰어다니지만 모글리를 연기하는 닐 세티는 블루스크린으로 채워진 스튜디오를 홀로 고독하게 뛰어다녀야 했다. 존 패브로는 배우가 특정 장면에 감정적으로 몰입하거나 자연스러운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세트 내에 여러 장치를 설치했다. 거대한 회전판이나 인공적인 구조물을 세트 바닥에 설치하고 배우가 그 위를 걷게 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곰 모양의 탈것을 설치하거나 여러 크고 작은 인형을 배우의 시선이 닿는 곳에 배치했다. 이 일련의 조치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영화를 상상하면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고독, 즉 블루스크린을 등진 상태로 카메라 테스트를 견뎌야 하는 배우를 위한 일련의 배려와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만으로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적 세계로부터 소외된 배우를 구제하기는 힘들었다.

<라이온 킹>

<라이온 킹>은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일출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를 사용했기 때문에 제작 과정에서 영화적 가상으로부터 소외된 배우의 고독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정글북>처럼 관객이 한편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도 실사영화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는 정도의 기술적 완성도와 그에 준하는 지각적 리얼리즘을 달성해야 했다. 존 패브로는 사실적인 이미지와 함께 몰입적인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작품의 제작에 참여한 주요 스태프들은 반경 16km에 이르는 아프리카 열대초원을 게임엔진에 구현하고, 그 세계를 가상현실 기기를 통해 접근했다. 가상현실을 위해 필요한 헤드셋을 쓰고 작품 속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그들은 가상현실에 구현된 영화 속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촬영에 필요한 조명, 카메라앵글, 환경, 소품 등을 결정하거나 조정했다. 그들에게 3D 이미지로 구축한 가상의 환경, 주인공 심바가 속한 영화 속 세계, 그리고 스태프들이 작업하는 영화 제작 현장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이었다.

<만달로리안>

<라이온 킹> 이후 존 패브로는 가상현실에 의존하던 비중을 대폭 줄였다. 그는 가상현실을 위한 헤드셋을 대신해 높이 약 6m, 너비 약 22m 규모로 만들어진 거대한 LED 월을 활용했다. 후방 영사 방식을 버추얼 프로덕션에 접목한 이 새로운 제작 환경을 통해 스튜디오 내에 있는 스태프들은 영화 속 세계를 바라보면서 또 그것에 몰입하면서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 존 패브로가 총괄 감독을 맡은 <스타워즈>의 드라마 시리즈에 해당하는 <만달로리안> 시즌1의 1화에 등장하는 첫 장면은 버추얼 프로덕션이라는 몰입적인 제작 환경이 기술적으로 고도화되어 있음을 잘 드러내는 경우다. 이 장면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은 어느 행성의 풍경과 그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스튜디오에서 실시간으로 매끄럽게 합성한 것으로, 관객이 이 장면을 보면서 실제와 가상의 경계를 구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장면은 오늘날의 영화 만들기와 영화 보기 모두 기술적으로 가상을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동시대 영화인들이 기술이 만든 가상이라는 왕국의 시민권을 향유하면서 그리고 그것에 진정성이 있다고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