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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원 편집장의 오프닝] 그해 봄의 불확실성
한 눈에 보는 AI 요약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매일을 버티는 것이 길게 느껴진다. 국내외 정세는 급변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들이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여전히 불안을 마주하고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준다. 혼란한 세상 속에서 극장에서의 침묵과 글쓰기를 통해 저항하고자 한다.

하루는 길지만 한달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시간의 무상함을 읊조리는 관습적 표현인데, 요즘엔 거꾸로 써야 할 것 같다. 하루는 정신없이 지나가지만 이걸 한달 내내 반복하고 버티려니 너무 길다. 또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몰라 겁이 난다. 가깝게는 급변하는 정세에 ‘다이내믹 코리아!’를 외치지 않을 도리가 없고 멀리 둘러봐도 세계질서가 바뀌고 있는 순간이라는 게 피부에 와닿는 요즘이다. 좌와 우, 안과 밖, 망원경과 현미경, 과거와 미래까지 모든 것이 맹렬하게 진동 중이다. 다시 만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불투명하고 불확실하다.

(매주 그렇듯) 목요일 마감 후 금요일 반나절 행복했다. 4월4일 금요일 윤석열씨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이제야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바로 다음날 (역사적으로 수차례 검증된) 이른바 ‘국회의장병’이 창궐하여 개헌 이야기로 속을 뒤집어놓는다. 내란 세력 척결 국면이 시간을 잘못 맞춘 개헌 논의에 흐려지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곧이어 숨 쉴 때마다 위헌 중인 대통령(이라고 쓰고 내란 수괴로 읽어 마땅한) 권한대행이 또 다른 폭탄을 터트렸다. 국민에 대한 조롱과 모욕에 가까운 인사권 남용 소식에 개헌 논쟁은 저 멀리 사라지고, 각자 계산기 두드리기 바쁜 합종연횡이 이어진다.

국제 정세는 또 어떤가. 트럼프발 관세 폭탄은 2차 세계대전 후 80년 가까이 이어온 자유무역 시대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다. 트럼프가 되돌리려는 ‘그레이트 아메리카’, 미국의 황금시대는 레이건 집권기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25대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 집권기, 이른바 도금시대에 맞춰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이 스스로 택한 고립주의는 어쩔 수 없이 전세계 정치 지형의 변화를 강요한다. 이제 ‘세계화’는 과거의 유물이 되는 걸까. 관세를 때린다고 했다가, 미룬다고 했다가, 오늘 또 중국에만 징벌적으로 집중한다는 뉴스가 도배된다.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고, 예측할 수도 없는 혼란 속에서 ‘중심’이 사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 와중에도 매주 영화를 보고, 쓰고, 말하며 마감을 이어간다. 한권의 책을 마무리할 때마다 ‘지금 이래도 괜찮은 건가’ 싶어 불안하다. 극장에 머문 그 잠깐 사이 세상이 바뀌어버릴 것만 같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스크린이야말로 불안의 맨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유일한 장소라 믿기 때문이다. 장뤼크 고다르의 <아워 뮤직> 속 언어를 빌리자면 “바라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 시선을 돌려야 하고, 상상하기 위해선 눈을 감아야 한다”. 챗지피티가 게워내는 지브리풍 이미지에 포위당한 일주일을 보내며 새삼 시간을 마주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 중이다. 이토록 소란스럽게 자가복제 중인 이미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까. 침묵의 시간이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니 피곤한 정보가, 낭비된 이야기가, 뭉개진 이미지가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린다. 우리에게서 사유의 시간을 앗아가려는 세찬 빗줄기를 맞으며 펜을 들어, 쓴다. 끄적임으로 저항한다. 극장에 머물러 침묵했던 오늘이, 부디 긴 하루로 기억되길 나지막이 읊조리며.(덧.이 글의 제목은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 제목을 그대로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