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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 (1975)
15세이상관람가
125분 드라마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마닐라 사람들의 남루한 일상적 풍경을 날 것 그대로 흝어가는 흑백의 화면으로 오프닝을 연다. 처음부터 극사실주의적 접근으로 필리핀의 맨얼굴을 건져 올리겠다는 호기로운 출사표를 던지는 셈이다. 1970년대 필리핀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거장 리노 브로카는 당시 유행하던 도피주의적 신파조 영화의 미혹을 떨쳐내고 비참한 민중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고자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산업화의 물결 속에 도시로 흘러간 애인을 찾아 나선 청년 훌리오의 마닐라 상경기를 그린다. 대중영화가 애용한 멜로드라마적 정조를 짙게 풍기면서도, 영화는 제3세계 개발독재화의 그늘, 더 나아가 사회 구조의 모순 고발이란 주제 의식을 극사실적 질감으로 형상화한다. 훌리오의 여정을 따라 마닐라의 거대 빈민 지역인 톤도(Tondo)를 유랑하는 카메라는 썩어가는 시커먼 도랑과 빈민들의 비참한 운명을 대비시키곤 한다. 또한 카메라가 점멸하는 네온 불빛 속을 떠돌 때, 돈과 육체를 탐하는 욕망으로 넘치는 도시의 밤은 선연하게 그 타락한 모습을 드러낸다.
후경으로 잡히는 이러한 도시의 파노라마 정반대 지점에, 자주 정면 클로즈업되는 훌리오의 얼굴이 있다. 첫사랑 리가야를 찾으려는 열정으로 충만한 그 표정은 비열한 세상을 결코 견디지 못할 순수의 집적물을 표상한다. 이 클로즈업된 얼굴 표정의 결은 산업화 및 자본주의와 교환된 원시적 공동체에 대한 향수와도 맞닿아서, 속도전과 착취체제에 희생당한 그 무엇을 가장 즉물적인 영상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상 가능하듯 비정한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세상 물정 모르는 프롤레타리아 청년의 패배는 필연적이다. 막다른 골목에 이른 그의 표정이 마침내 슬픔과 분노로 일그러질 때, 희생양으로서 그의 존재는 더욱 부각된다. 이는 출구를 조금도 열어놓지 않는 숨막힌 결말이지만 현실의 모순을 가장 즉각적으로 인지케 하는 리얼리즘의 저력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는 제3세계 민중들의 질곡과 수난을 환기시켰던, 필리핀 뉴웨이브의 한 단면을 목도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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