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노 브로카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면 당신은 1970년대 아시아 영화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그 시대의 시네아스트 중의 위대한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 리노 브로카는 1970년대 아시아 영화에서 (홍콩의) 호금전, (일본의) 오가와 신스케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걸작선에 오가와 신스케가 빠진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리노 브로카는 1970년에 그의 첫 번째 영화 <구인광고; 완전한 유모>를 만들었고, 그 이후 (리노 브로카의 필모그래피는 자료마다 다른데) 50여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필리핀에서 1970년에 데뷔했다는 말은 그가 독재자 마르코정권하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리노 브로카는 아시아에서 서구제국주의 식민지의 경험아래 정권을 장악한 군부독재로부터 민중의 해방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식을 가진 최초의 ‘제 3 영화’ 시네아스트였으며, 또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 최초의 게이 시네아스트였다. 말하자면 리노 브로카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유럽에서 한 역할을 아시아에서 동시대에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사한 정치적 슬로건이나 과격한 성 정치학에 빠져든 따분한 수다쟁이가 아니다. 리노 브로카는 그런 설명이 필요 없는 아시아 영화의 거장이다. 그리고 1975년에 만든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내 생각에) 그의 최고 걸작이다.
에드가르도 레이예스의 원작을 영화화한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는 저예산으로 마닐라의 슬럼가에서 촬영되었다. 시대는 마로코스의 독재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 정치적 실종과 빈부격차는 이미 한계를 넘었고, 마닐라는 부자들의 호화찬란한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가난하지만 젊고 착한 어부인 훌리오는 어린 시절에 헤어진 옛 사랑 리가야를 찾아 마닐라에 온다. 하지만 그녀를 쉽게 찾을 방법이 있을 리 없다. 그는 이 도시에서 버티기 위해 뒷골목의 조직의 함정에 빠져들어 조금씩 나쁜 일에 눈을 뜨기 시작하고, 급기야 게이 매춘에까지 손을 댄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리가야가 악랄한 중국인 기둥서방의 아이를 낳고, 그에게 붙잡혀 노예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훌리오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물론 남은 일은 끔찍한 살인과 그 보복이다.
리노 브로카는 이 영화를 마닐라 도시를 무대로 ‘라이브’하게 진행한다. 그러므로 이 슬픈 이야기는 어쩌면 리노 브로카가 마르코스 정권 치하의 필리핀을 찍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혹은 이 이야기는 정치적 알레고리이다. 주인공 이름인 훌리오 마디아가는 ‘인내’와 동음동의어(同音同意語)이며, 그의 연인 리가야 파라이소는 ‘즐거운 천국’이란 뜻이기도 하다. 또한 중국인 기둥서방 아 텍은 ‘돈’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명백히 필름 느와르의 장르적인 빛과 그림자로 마닐라 길거리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스타일로 찍은 이 처연한 멜로드라마는 그들 이름을 따라서 마르코스 정권 하의 ‘참을 수 없는’ 인내와 ‘실종된’ 천국, 그리고 ‘무자비한’ 돈에 관한 순환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는 리노 브로카를 국제적인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그 이후 이어지는 이른바 리노 브로카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아시아에서 온 이 우아하고도 정치적이며, 게다가 공개적인 최초의 아시아 퀴어 시네마에 서방세계는 일종의 쇼크를 받았다. 이 영화 ‘이후’ 깐영화제는 그의 <인시앙>(1976년, 감독주간, 아마도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와 견줄만한 그의 걸작), <자가>(1980년, 경쟁부문), <보나>(1981년, 감독주간), <바얀코>(1984년, 경쟁부문), <오라프로노비스>(1989년, 감독주간)를 연속적으로 초대했다. 그러나 리노 브로카는 1991년 5월 22일 마닐라 거리 한복판에서 교통사고로 ‘갑자기’ 죽었다. 그의 나이 52세. 이 비보를 접하자 까이에 뒤 시네마는 리노 브로카 특집을 다루면서 그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죽음, 하지만 우리들에게 그보다 더 큰 예술가의 상실” 당신이 <네온 불빛 속의 마닐라>를 보면 그 슬픔이 더 커질 것이다. 나는 하루 빨리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리노 브로카의 전작 회고전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