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에덴을 상상하는 한 인간을 추방하려는 영화의 연약한 안간힘을 지켜본 것 같다.
숀 베이커 감독의 <레드 로켓>을 재고하는 길은 마이키(사이먼 렉스)의 경로를 그려보는 일이다. 시작은 그의 귀환이다. (스스로 말하길) 잘나가는 포르노 스타였던 그는 오랫동안 보지 않았던 부인 렉시(브리 엘로드)와 장모 릴(브렌다 데이스)의 집으로 방금 막 되돌아왔다. 숀 베이커의 영화는 이따금 다른 곳에 있던 인물(들)이 새로운 곳에 도착하면서 서사의 물꼬를 트곤 했다. <탠저린>에서 라즈믹의 처갓집 식구들이 크리스마스를 맞아 찾아오듯,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젠시가 퓨처랜드 모텔로 방을 잡아 들어오듯, 도착을 통해 하나의 갈래가 그어진다. 물론 이 도착은 정착이 아닌 기착이라 늘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는 (숀 베이커가 자주 그려온) 홈리스의 삶에 있어 불가피한 상태이기도 할 터이다. <레드 로켓>의 초반부에서 마이키 또한 텍사스에 도착한다. 주목할 지점은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유를 찾기 전부터 마이키의 대책 없이 뻔뻔한 면모가 드러나 관객은 이미 그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다. 이상하게도 본 적 없는 그의 전사(前史)가 그려진다. 말하자면 앞으로 벌어질 일은 과거에 이미 발생했던 사태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반복되는 사건의 연속일지 모르겠다는, 염려스러운 전망.
귀환(return)으로 시작된 그의 운동은 내내 우회로(detour)를 찾으며 전개된다. 렉시의 문전박대를 시작으로 영화의 초반부는 내내 마이키가 거절당하는 상황들로 이뤄진다. 구직을 위해 이곳저곳 방문하지만 전부 거부되고, 거주 일수가 부족해 실업수당도 불허된다. 오랜만에 만난 옛 동창과 이웃도 모두 그의 복귀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당장의 생계와 체면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그는 렉시에게 자전거를 빌리고, 이웃 리온드리아와 준 모녀에게 마리화나를 얻고, 로니에게 자동차를 얻어 타며 계책을 강구한다.
돌아보건대 미국을 배경으로 소수자의 삶을 꾸준히 그려온 숀 베이커는 소재 때문이 아니라 그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 때문에 각별함을 인정받아왔다. 예컨대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현란하고 활기 넘치는 세계는 인물들의 삶을 윤색하는 환경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루는 현실의 조건이 (피상적으로나마) 이토록 다정함을 환기하기 위한 조건이며 동시에 그럼에도 허물어지고 말 연약한 지반임을 들추기 위해 호출된 세계다. 그래서 숀 베이커가 주력하는 것은 결국 이 경쾌한 삶의 외투를 벗기는 일이다.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은 모욕을 당해 가발을 벗어야 하고, ‘순수’나 ‘무구’로도 압도되지 않는 부조리는 아이의 떼쓰는 울음과 함께 얼룩진다. 이렇듯 숀 베이커는 긍정 안에서도 산재하는 벼랑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여전히 인물들에게 연민과 애정을 지켜온 연출자였다. 그런데 <레드 로켓>은 마이키에게 한없이 냉소적이다. 이를 <레드 로켓>에서 운용되는 리듬과 연결지어볼 수 있을까.
본편의 이상한 지점 중 하나는 숏의 흐름이 매우 단속적이라 인물이 겪는 사태가 뚝뚝 끊긴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선후/인과 관계는 절충되고 있지만) 유연한 액션과 리액션의 교류가 좀체 발견되지 않는다. 어떤 사건 후 다음 장면에서 예기치 못한 다른 사건이 일어나거나 아예 반전되는 사태도 빈번하다. 이는 현재가 예측 불허한 시제임을 역설하는 것 이상으로 마이키가 연루된 상황의 지속을 의도적으로 가위질하고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 이를테면 자주 등장하는, 마이키가 황급히 침대에서 잠을 깨는 장면과 같은 짧은 인서트는 앞선 흐름을 일순간 절개한다. 혹은 잦은 섹스 장면 또한 행위의 도중에 있음을 제시할 뿐 그 시작이나 끝이 연속적으로 담기지는 않는다. 후반부에 벌어지는 22중 연쇄 추돌 사고 또한 정확한 전말은 이후 TV뉴스를 통해 전달된다. 이러한 전략은 영화의 처음부터 등장하는데, 바로 오프닝부터 마이키를 향한 추방을 예견하는, 엔싱크의 'Bye Bye Bye'가 그의 걸음을 따라가는 몽타주와 함께 외재음으로 흘러나오던 중 또 다른 숏으로 넘어갈 때 급격히 중단되기 때문이다. 그와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지만, 일단 그가 텍사스로 (다시) 발을 들인 이상 그 인사는 유보될 수밖에 없으며 그리하여 영화는 그가 속한 세계를 뭉텅 잘라내는 데 전력한다.
앞서 언급한 오프닝과 후반부에서 스트로베리(수잔나 손)- 극중 그녀의 이름은 레일리지만 반복되어 언급되는 ‘예명’ 스트로베리가 더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 같은 곡을 편곡해 부르는 대목이 상반되어 보인다는 사실은 양자를 견주어보게 만든다. 관객이 <레드 로켓>의 마이키를 애정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많지만, 무엇보다 그가 이제 막 18살이 되었다는 스트로베리와 연애(그리고 섹스)에 어리석을 정도로 적극적이며 이를 발판 삼아 포르노 산업의 에이전트로 재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작금의 관객으로 하여금 마이키가 쇄신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이를 염두에 둔 채 두 인물이 섹스를 마친 후 스트로베리가 'Bye Bye Bye'를 부르는 장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나란히 앉은 둘을 비추다, 피아노로 다가가는 그녀를 따라간 후 그녀의 노래를 배경음 삼아 후경에 위치한 마이키쪽으로 다시 향한다. 본편에서 매우 드문 이 연속된 흐름에는 모종의 계산이 담겨 있다. 이 왕복은 마이키에게 ‘되돌아가는’ 움직임으로써, 스트로베리를 지나 그 자신에게 다시 당도한다. 거친 명세를 앞세우자면 <레드 로켓>에서 왕복운동은 마이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성찰의 기회다(그가 텍사스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 것처럼). 우리는 마이키와 스트로베리 사이에 있었던 엇비슷한 순간들을 떠올려볼 수 있다. 스트로베리를 처음 만난 날 그는 도넛 가게에서 귀가한 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만 그새 스트로베리는 퇴근해 만나지 못한다. 또는 얼마 후 그곳을 방문해 플러팅을 시도하려다 바쁜 시간대에 제대로 대화할 틈이 나지 않자 나중에 온다고 말한 뒤 밖을 돌아다닌다. 달리 말해 마이키는 그 순간 멈춰야 했던 일을 반복함으로써 일말의 상식을 회복할 기회를 잃는다. 전술한 후반부의 'Bye Bye Bye' 장면에서 스트로베리는 마지막 인사를 노래하고 있다. 이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마이키의 얼굴이 하나의 흐름 안에 배치될 때, 그는 선택을 해야 하지만 역시나 옳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기에 숏은 거기서 잘린다.
그리하여 영화는 되돌아온 마이키를 제자리로 (재)위치시키려 한다. 텍사스 바깥으로, 그리고 인간 아닌 차원으로. 전자는 마이키가 잠든 와중에 렉시와 릴을 비롯해 이웃들이 찾아와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뺏고 퇴거를 명령하는 서사에서 확인된다. 후자는 <레드 로켓>의 누드와 섹스라는 라이트모티프와 연관이 있는데, 이는 개나 늑대 같은 동물의 발기를 의미하는 은어인 영화의 제목과 긴밀히 결탁함으로써 강화된다. 마이키는 마치 선사시대의 혈거인(caveman)처럼 헐벗은 채 돌아다니느라 실수로 성기를 보이기도 한다. 비아그라 덕에 활약한 그의 성기는 마치 그것을 쓰기 위해 사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레드 로켓>에서 마이키는 명백하게 동물의 ‘야생성’ 혹은 문명이 도래하지 않은 사회의 ‘야만성’을 지닌 인물로 겹쳐진다(물론 이러한 도식에 영화를 모조리 의탁하는 것은 위험하며, 문학평론가 김보경의 지적대로 ‘동물화’가 왜 모욕의 기제로 작용되고 그것이 어떤 기만을 지니는가에 관한 질문도 섬세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일단 <레드 로켓>은 마이키를 야생/야만만큼(혹은 보다) 벗겨진 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그를 내쫓는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나 할까(여기서 우리는 별수 없이, 자신들의 벗은 몸을 늦게 깨달은 아담과 이브를 상기하게 된다). <레드 로켓>의 결말은 간단한 상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을 인간 아닌 차원으로 자연화하려는, 영화의 미약한 결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