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재일 한국인 건축가 고 이타미 준의 작품 세계를 담은 다큐멘터리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를 통해 2만3천여명의 국내 관객에게 ‘건축 영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줬던 정다운, 김종신 감독이 이번엔 도시로 그 시선을 확장했다. <위대한 계약: 파주, 책, 도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계약’을 통해 만들어진 파주출판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따뜻한 시선으로 산책하듯 둘러보는 영화다. 건축 전문 영화영상제작사 ‘기린그림’을 운영하고 있는 두 감독은, 2008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파주출판도시 관련 인터뷰 영상을 작업하면서 이 도시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그 후 실제로 이곳에서 아이들과 자주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영화까지 찍게 된 건 명필름의 이은 대표로부터 도시 기획 30주년 영상 제작을 제안받은 것이 계기다. 정다운 감독은 이를 두고 “운명 같다”고 표현했다.
- 파주를 담고자 했던 계기가 궁금하다.
정다운 파주출판단지조합의 이사장이기도 한 이은 대표의 제안을 받고 운명 같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이 도시의 존재를 알았을 때, 도시 자체의 매력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는 공간이란 것을 알고 매료되었다. 그 후 부모님을 모시고 온 적도 있는데, 특히 아이들과의 추억이 많다. 그렇게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장소에 대한 프로젝트를 먼저 제안받고 정말 기뻤다.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작업에 들어갔다.
- 이 도시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정다운 2008년에 건축가들과 인터뷰 작업을 하면서 도시가 만들어진 배경에 대해 듣고 정말 놀랐다. 출판이 산업으로 아직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이 오직 꿈과 열정만으로 계획도시를 만든 것이다. 건축과 도시에 대해 오랜 기간 공부해왔는데 특히 한국에 이런 특별한 도시가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김종신 집이 도심 한복판인 남산인데, 그러다 파주에 오면 왜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았다. 이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그 이유를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여러 가지 매력이 있지만 무엇보다 도시가 만들어진 과정에 ‘위대한 계약’이 있었다는 점이, 어떤 지나가버린 유토피아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영화가 가장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다.
- 영화가 파주출판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시의 역사를 얘기하는 초반부는 아예 땅을 구입하는 모습부터 시작되는데.
정다운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방식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의 역사 얘기를 하지 않고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것이 없다면 이 도시의 정체성이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맞물려 진행되는 도시 기획 과정, 그리고 출판인과 건축가의 치열한 노력, 그것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파주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종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미래 세대에 더 큰 도움이 되는 도시를 물려주겠다는 그 정신이 무엇보다 핵심이었기 때문에 서두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역사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 따라 극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김종신 실제로 편집 과정에서 그 부분을 얼만큼 다룰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절대로 뺄 수 없는 부분이기에 최대한 짧고 굵게 가는 전략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유지수 편집감독님의 공이 컸다. 유 감독님은 할리우드에서 아카이브 형식의 다큐멘터리 편집을 맡아오셨던 분이다. 덕분에 최대한 지루하지 않게 영화의 핵심을 잘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 극적인 장치가 돋보였던 전작 <이타미 준의 바다>와는 다른 접근이라고 느꼈다.
정다운 맞다. 그때는 내가 이타미 준 선생님에게 받은 느낌과 감동을 내 나름의 방식으로, 특히 이미지적인 측면에서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었고, 그게 그 영화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판단했다. 도시는 한 사람이 아닌 집단 지성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이를 잘 전달하려면 변하지 않는 고정된 사실, 즉 역사를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의 작가적인 해석이 들어갔을 때 이 도시의 정신이 왜곡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 대신 인상적인 것은 파주의 여러 건축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자막으로 등장하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이름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이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제시된다는 것이 뭔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정다운 <이타미 준의 바다> 때는 건축가 한 사람의 작품으로 접근했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두 존재가 ‘같이’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위대한 계약’이 위험한 계약에 머물지 않고 마침내 위대해진 건, 출판인(건축주)과 건축가의 화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종신 요즘은 건축주가 스스로 설계 프로그램까지 배워서 모든 것을 정해놓은 뒤, 건축가에게 아무런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이렇게 건축가의 의견이 묵살되는 경우가 많은데, 파주출판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건축가의 의견이 조화롭게 반영됐다. 그 점 역시 앞서 말한 유토피아의 하나의 예시를 보는 것 같았고,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싶었다.
- 한국 건축 영화에서 독보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차기작 역시 건축 이야기일까.
정다운 조경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주인공은 1세대 여성 조경가 정영선 선생님이다. 이미 영화의 상당 부분이 진행되고 있다.
김종신 선생님은 80대이신데도 여전히 현장에 나설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시다. 선유도공원 조경이 선생님의 대표작이다. 이번 영화에도 잠깐 등장하는데 그 촬영을 계기로 차기작까지 좋은 인연을 이어갈 수 있었다. <땅에 쓰는 시>가 그 제목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