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전주국제영화제]
JeonjuIFF #5호 [스코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전주대담 : <여자만세> <여판사>' - 신수원·부지영·윤가은 감독이 들려주는 이야기
2022-05-02
글 : 정예인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여성감독의 과거-현재-미래를 말하다

“홍은원 감독의 책상 앞에 앉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 내가 1960년대에 활동한 여성감독의 책상 앞에 있네, 하고 생각했어요. 그 순간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2011년 다큐멘터리 <여자만세>를 제작하며 홍은원 감독의 발자취를 좇던 신수원 감독은 취재차 방문한 홍 감독의 집에서 영화 같은 순간에 빠져들었다. 한국 영화 역사상 두 번째 여성감독 홍은원의 흔적으로부터 자신의 오래된 고민을 겹쳐 보아서다. 한국에서 여성감독으로 산다는 것. 이 오래된 화두에 답하기 위해 한국영화계에서 분주히 활약 중인 세 여성감독이 한 자리에 모였다.

4월30일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에서는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미니 특별전 ‘오마주: 신수원, 그리고 한국여성감독’과 함께하는 전주대담이 진행됐다. <레인보우> <오마주>의 신수원 감독을 필두로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카트>의 부지영 감독, <우리들>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이 여성감독의 사정에 대해 털어놨다. 현실과 미래, 꿈과 고민에 대한 감독들의 발언에 빈자리 없이 가득 찬 객석에서는 연신 공감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신수원 감독의 신작 <오마주> 제작기부터 유실됐다 일부 복원된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가 지니는 의미, 영화 현장에서의 여성 영화인이 갖는 고뇌에 이르는 대담을 일부 옮겨보았다. 진행은 <씨네21> 이다혜 기자가 맡았다.

이다혜 기자

-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는 2015년도에 이르러서 디지털 복원됐다. 신수원 감독님이 <여자만세>를 찍을 당시만 해도 볼 수 없던 상황이었다. <여판사> 필름을 실제로 보았을 때 기분이 어땠나.

신수원 2011년에 다큐멘터리 <여자만세>를 촬영할 때는 홍은원 감독님이 찍은 장편 영화 3편의 프린트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답답한 상황이었다. 몇 년 전 어떤 분이 창고에 있던 필름을 영상자료원에 기증하셨고, 자료원 측이 필름을 디지털 복원했다. 그렇게 되살아난 <여판사>를 극장에서 본 건 나도 오늘이 처음이다.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건 세련된 미장센이다. 와이드앵글을 쓰는 방식이라든지, 인물들의 동선, 대화 장면 같은. 이분에게 투자가 이루어졌다면 김기영, 이만희 감독 못지않은 여성 거장 감독을 1960년대에 가질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권선징악도, 악인도 없는 방식으로 구성된 인물을 통해서는 시나리오에서는 느끼지 못한 연출의 힘을 느꼈다. 뭉클했다.

- 신작 <오마주>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흥행 실패로 슬럼프에 빠진 중년의 영화감독이 홍은원 감독의 <여판사> 필름을 복원하면서 경험하는 일을 다루고 있다. 자전적인 이야기인 듯한데.

신수원 2010년에 <레인보우>를 만들고 나서 두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고민에 빠졌다. 그 무렵 <여자만세> 다큐멘터리 제안이 들어왔고, 홍은원 감독님의 사라진 필름을 알게 됐다. 홍 감독님은 세 번째 작품을 내놓은 이후 영화를 찍지 못했다. <여판사>는 당시 20만 명의 관객이 들 정도로 흥행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홍 감독님의 활동은 단절되고 필름도 사라졌다. 이러한 사례는 어떤 두려움을 갖게 했다. 그때 막연히 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심적으로 지쳤을 때 홍은원 감독이 떠올랐다. <여판사> 필름이 발견됐다는 것 역시 힘이 됐다.

신수원 감독

- 과거 여성감독의 사례를 보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영화 현장에서 문제시되기도 했다. 지금의 영화 현장은 어떠한가.

부지영 여성 영화인들을 암묵적으로 배제하는 문화는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최근 독립영화 진영에서 여성감독들이 좋은 작품을 만들어 주목받고 있지만 산업 안에서는 여전히 잘 보이지 않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윤가은 영화 현장에 여자가 있으면 재수가 없다는 식의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다만 어떤 편견은 아직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그저 개인이지만 마치 여성감독을 대표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고, 그럴 때 나는 전투를 치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신수원 두 분의 이야기에 공감이 간다. 어떤 자리에서는 내가 유령인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또 내가 무언가를 해내야 할 때 남성들보다 몇 배를 노력해야 인정해준다는 인상을 받았다. 계속해서 증명해내야 하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 윤가은 감독이 ‘전투’라 표현한 것처럼 칼 없는 전쟁터에 서 있는 느낌을 받곤 한다.

- 영화 학도의 성비를 보면 최근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증가하는 추세다. 그럼에도 상업영화 진영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앞지르는 듯 보이는데.

부지영 산업 안에 있는 여성 감독의 말에 따르면, 투자자 사이에서는 여성 감독의 영화에 60억 이상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게 불문율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 불문율을 깬 것이 유일하게 임순례 감독님 딱 한 분이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따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틀에 우리를 맞춰야 하는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본다. 조금 희망적으로 보는 점은 OTT나 유튜브, 웹드라마 등의 산업 내부에 여성창작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여성창작자가 산업 안에 없다고 단정 지을 게 아니라 폭넓게 사고할 필요가 있다. 영화만 고집하지 않고 다른 장르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여성 창작자들을 알 필요가 생각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들에게 응원을 보내야 하고.

신수원 영화 현장에도 변화가 있다. 과거에는 현장 스태프들, 특히 촬영팀이나 조명팀은 거의 다 남성으로 이루어졌다. 반면 의상이나 미술 분야는 거의 여성으로 이루어졌고. 그런데 최근에는 남성의 영역이라 여겼던 진영에 여성 스태프 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렇게 젠더의 경계가 현장 스태프 내부에서 허물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부지영 감독

'여성'이라는 명명, 부정과 가능성 사이

- 영화를 연출하는 입장에서 나로부터 나오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과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국한되지 않아야 다음 영화의 기회가 오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 사이에서 갈등하지는 않는지.

윤가은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최근에는 왜 산업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계속 고민하게 된다. 여자아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는데 그것 말고 다른 서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을 때, 지금 내가 산업 안에서 자리매김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된다.

신수원 <명왕성>을 제외하고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그러다보면 여성이 주인공이면 투자받기 힘들다는 말을 듣곤 한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서 저예산 영화를 찍겠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저예산을 감수하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하게 됐다. <오마주>를 찍으면서는 이것이 나의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부지영 왜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만 만드냐는 질문은 창작자를 위축시키는 부당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남성 감독들에게는 왜 남자 이야기만 제작하냐고 질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아는 서사를 할뿐인데, 마치 그런 작품을 만들면 돈 못 번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윤가은 감독

- 이른바 ‘여성영화’ ‘여성서사’라고 하는 명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신수원 여성영화라는 명명은 힘의 관계에 밀려나있기 때문에 붙여지는 이름인 건 아닐까 고민한다. 하지만 좋은 영화를 만드는 여성 감독이나 현장 영화인, 스태프 수가 늘어나면 점점 사라질 단어가 되지 않을까.

부지영 최근에는 여성영화라는 이름이 게토화된 의미로 다가올 때가 있다. “투자 안 되는 영화”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여성영화’를 사용하는 이들을 접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 언젠가 여성영화의 수가 많아져서 굳이 지칭하지 않아도 될 때 자연스럽게 사라질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 마무리 질문을 드릴까 한다. <여자만세> 도입부에서 신수원 감독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내게 꿈을 꾸게 해주었던 카메라가 다른 여자들에겐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 질문을 감독님들께 되돌려드리고 싶다.

부지영 만약 영화를 찍지 않았다면 화가 많이 났을 것 같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데 글을 잘 쓰는 편도 아니고, 노래를 잘 부르는 편도 아니고. 그런데 영화는 그리고 카메라는 나의 말을 속 시원하게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무기가 되어 줬다.

윤가은 왜 영화를 하는가. 어려운 질문이다. 영화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어떤 세계를 구현하고, 한목소리를 내고, 그렇게 만들어진 장면을 정해진 시간 동안 여럿이 모여 보고 듣는 장르다. 이렇게 소통하는 장르는 많지 않다. 누군가와 소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영화를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요즘 많은 분들이 다양한 매체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서 좋은 현상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계속됐으면 좋겠다.

신수원 오늘 2011년에 방송으로 봤던 <여자만세>를 큰 스크린으로 보면서 10년 전의 나는 젊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에게 영화는 꿈이라기보다 현실이다. 영화 하는 모든 분들, ‘존버’하시길 바란다. 꿈보다 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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