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7일, 강수연 배우가 눈을 감았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되었다는 비보를 접한 지 사흘 만에 들려온 돌이킬 수 없는 부고였다. 장례식장에서 영정 사진 속 그의 고요한 얼굴에 눈을 맞추자니, 이것이 영화 속 연출된 한 장면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온 영화인들의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강수연 배우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때부터 발인까지 계속해서 곁을 지킨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사장)을 비롯해 <씨받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 등을 함께한 임권택 감독, 고인의 유작이 된 영화 <정이>를 만든 연상호 감독, 후배 설경구와 문소리 배우는 5월11일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애통하고 애틋한 작별 인사를 전했다. 갑작스러운 이별이 믿기지 않는다. 여전히 그리고 도무지.
배우 강수연의 과거 기사들을 들춰보았다. 1995년 늦가을에 발행된 <씨네21> 28호의 특집 기사 주인공은 강수연이었다. 표지에 박힌 카피도, 내지에 적힌 제목도 ‘강수연’ 이름 세 글자가 전부였다. 당시의 인터뷰 기사를 읽는데 본인만의 확고한 연기론과 카리스마가 지면을 뚫고 전해졌다. “자기주장이 강하다고도 하는데?”라는 기자의 질문에 강수연은 이렇게 답했다. “어렸을 때는 명료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말을 안 들으니까 성질부리고 까탈스럽게 굴고 싸우기도 했어요. 어느 날부터는 내 말에 귀 기울이니까 유해졌어요. 내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정확해야 해요. 확실한 이유가 있지 않으면 주장하지 않아요. 그래서 명료하다, 똑 부러진다, 대가 세다고들 하나봐요. 여자니까… 나이가 어리니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일하니까….” 27년 전 인터뷰를 읽는데 괜히 울컥했다. 4살에 연기를 시작해 하이틴 스타로 인기를 구가했고, 스물을 갓 넘겨 월드 스타가 되어 변방의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힘을 보탰고, 20대 때 이미 ‘대배우’라는 수식을 가졌던 강수연. 짊어진 왕관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겠냐마는, 강수연은 한번도 그 무게에 짓눌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문성근 배우가 전한 말처럼 “강수연은 연기 예술에 대해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서 강한 자긍심을 가진 배우”였다. 그 태도를 오래 기억하고 싶다. 아니, 분명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