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런트 라인]
김병규 평론가의 영화적 고정 장치에 관한 노트
2022-06-15
글 : 김병규 (영화평론가)
이미지의 조건, 영화적 몸짓

코고나다의 <애프터 양> 첫 장면에는 두 가지 종류의 촬영이 제시된다. 네 가족의 평화로운 한때를 오래된 필름카메라에 담아내는 아날로그적인 사진 촬영이 전면에 드러나 있고, 테크노 안드로이드인 양(저스틴 H. 민)의 시선을 통해 실시간으로 기록되는 비밀스러운 촬영이 다른 한편에 숨겨져 있다. 뒤늦게 알려지는 사실이지만, 안드로이드는 날마다 몇초씩 녹화할 수 있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렌즈(눈)에 찍힌 기록은 기계 중심부 기억 장치에 영원히 저장된다. 양이 고장을 일으키고 더이상 작동하지 않자 제이크(콜린 패럴)는 양의 기억 장치를 추출해 기록된 영상을 보게 된다. 제이크는 크리스 마르케의 <환송대>에서 묘사되는 시간 여행자처럼 두눈에 디스플레이 장치를 부착하고 눈앞에 떠오르는 비인격적 이미지를 바라본다. 두눈이 가려진 그의 시선 앞으로, 기억 장치에 새겨진 수집가의 기록이 무작위로 펼쳐진다.

<h3>영화를 움직이게 하는 것

<애프터 양>

카메라 렌즈는 인간의 눈처럼 현실의 한 단면을 기록하지만, 언제나 비인간의 기계적이고 무심한 시각을 전제한다. 양이 수집한 이미지를 제이크가 맞닥뜨릴 때, 그의 눈에 투사되는 영상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주체가 사라진 채로 펼쳐지는 과거의 세계다. 당사자가 사라진 뒤에도 남겨져 있는 현실의 기록을 지켜보는 시선은 여전히 존재한다. 흥미롭게도, 제이크는 그런 기억 없는 기계장치에 저장된 이미지의 감촉을 반복해서 지켜보면서 안드로이드 양의 내밀한 기억과 경험에 접근한다. 영상은 그것을 보는 이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이미지와 소리를 밀접한 삶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인다. 양이 녹화한 지극히 사적인 비디오는 그의 감춰진 역사를 대변한다. 그것은 관람자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 펼쳐지는 세계의 기록을 제공한다. 제이크는 눈을 가린 상태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고, 만날 수 없던 이들의 얼굴과 마주한다. 이미지를 보는 체험은 이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사건 앞에서 혼란을 겪는 인물에게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고, 다른 말을 건넬 기회를 제공한다. 변형된 삶을 꿈꾸는 제이크의 이런 여정은 스크린을 통해 타인의 기억과 경험을 훔쳐보는 영화 관객이 누리는 특권적 체험이기도 할 것이다.

<애프터 양>에서 안드로이드가 수집한 이미지를 대면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을 중단하고 한 자리에 고정된 서로 다른 두 신체의 자세가 수반되어야 한다. 양이 작동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로 박물관 보관소에 누워 있는 동안, 제이크는 영화를 보듯이 소파와 자동차 뒷좌석에 앉아 움직임을 멈추고 기억 장치에 저장된 영상을 바라본다. 눈을 감은 채로 움직이지 못하는 양과 영상을 보기 위해 눈을 감고 자리에 앉는 제이크. 한 차례 주어지는 짧은 플래시백을 제외하면, 이 영화에서 그들이 대화를 나누거나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통상적인 친교의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제이크와 양은 동작을 멈추고 신체를 고정하는 한 가지 자세를 공유한다. 이미지를 목격하고 다른 이의 삶을 발견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 타인과의 접속을 성립시키고 영화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기계장치와 기구가 요구하는 특정한 자세를 수용해야만 한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의자에 앉아 스크린이라는 흰 벽을 바라보는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근미래 도시를 묘사하는 <애프터 양>과는 반대 방향의 시제를 표시하지만, 1960년대 이탈리아 남부 시골 마을 근처에 있는 미지의 동굴을 탐험하는 고생물학자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의 <일 부코>에서도 이미지를 발견하려는 열망 아래에 있는 불가피한 조건을 관측할 수 있다. 감독인 프라마르티노의 말을 빌리면, 동굴 탐험가들은 지상에서 목격되지 않는 마지막 세계를 기록하는 자들이다. 오늘날, 지구의 표면은 모두 디지털 지도의 사진 이미지로 기록되어 있고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존재하는 곳은 눈에 비치지 않는 지반 아래의 수직적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굴 탐험가들의 작업에 관한 프라마르티노의 근사한 정의에 다른 견해를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는, 지하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탐험가들의 탐색과 그들을 따라가는 영화 촬영을 가능케 한 물리적 조건을 말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에 탐험가들은 사다리와 줄에 의지해 동굴 밑바닥으로 진입한다. 그 아래로 횃불이 던져지고 완전한 어둠 속에 가려져 있던 동굴의 윤곽이 지하로 떨어지는 불빛에 의해 드러난다. 암흑에 덮여 있던 공간이 환하게 밝혀지고 경계 저편의 형상이 카메라 프레임에 잡히는 순간이다. 영화가 지하 동굴의 이미지를 획득하고 규정하기 위해서는 지하로 내려가는 탐사자의 신체를 매달아두는 사다리와 줄이 필요하다. 간과하기 쉽지만, 탐험가들의 몸을 고정하도록 고안된 기기들이 없다면 미지의 이미지를 영화에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장치에 몸을 싣는 것은 낯선 기억으로의, 지도에 없는 미지의 공간으로의 여행을 불러들인다. 구덩이와 갱도, 동굴 지하와 절벽 아래의 아름다움에 근접하는 것이다.

<일 부코> 마지막에는 탐사한 동굴의 구조를 지도에 옮겨 그리는 긴 장면이 나온다. 보이지 않던 지하 동굴의 형태가 탐험가들의 눈으로 관측되었고, 약간의 시간을 거쳐 그들의 손이 그것을 지도에 기록하고 있다. 이 매혹적인 장면은 마치 발견되지 않은 이미지를 카메라에 새기고 이를 손작업으로 연결하는 프라마르티노의 고독한 영화적 작업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장면이 있기에, <일 부코>를 눈과 손 사이에 있는 신체적 감각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말 직전에, 카메라는 동굴 탐험가들의 여정과 더불어 영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어느 양치기 노인의 죽음을 보여준다. 노인이 침대에서 숨을 거두면 주변 사람들은 열려 있던 문과 창문을 닫는다. 화면은 완전한 어둠에 둘러싸인다. 노인과 수직 동굴은 대칭적 관계를 이루는 것처럼, 동굴 모든 곳에 빛이 닿아 탐사가 끝나자 노인의 집에는 어둠이 드리운다. 위대한 촬영감독 레나토 베르타의 카메라는 조금 전까지도 화면 앞에 있던 대상의 외형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한다. <일 부코>의 결말을 이루는 두 장면은 스크린 앞에 나타나는 현상과 더불어 그것을 만들어내고 수용하는 조건을 들여다볼 것을 환기한다.

<h3>강탈된 대상과 이미지의 매혹

<은판 위의 여인>

구로사와 기요시의 <은판 위의 여인>에는 19세기에 성행하던 사진 촬영술을 고집하는 사진작가 스테판이 나온다. 실물 크기의 은판을 활용해 인물의 초상 사진을 찍는 그는 모델인 딸 마리의 신체를 기구에 묶어두고 오랜 시간 같은 자세로 촬영을 지속한다. 한 장면을 찍는 데 짧게는 20분에서 길게는 몇 시간이 소요되는 촬영을 통해 스테판은 원하는 이미지를 은판에 박제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자세를 유지하는 작업 방식으로 인해 피사체인 마리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만큼 쇠약해지고 만다. 이 강박적이고 병적인 촬영술의 절차가 보여주는 것은 명백하다. 이미지를 제작한다는 건 단순히 카메라와 피사체의 결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의 신체를 붙잡아두고 카메라와 조명기를 지지하는 기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애프터 양>의 첫 장면에서 세 인물이 가족사진을 찍기 위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않고 멈춰서 양을 기다리던 것을 떠올려보자. 이런 장면들은 우리가 마주하는 이미지를 규정하는 배경에 피사체의 움직임을 한정 짓는 공간적 구조가 설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공교롭게도 <은판 위의 여인>에서 사진 촬영을 위해 동원되는 기구들은 병원에서 쓰이는 장치들과 흡사하다. 사람의 몸을 지탱하고, 카메라와 조명기의 각도를 조정하는 기기를 활용하는 장소는 영화를 촬영하는 현장과 병원이 아니라면 선뜻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피사체의 신체를 통제하고 고정하는 스테판/구로사와의 작업은 환자의 증상을 관찰하고 교정하는 병원의 진료와 부분적으로 닮은 걸까? 그러고 보면 장시간의 촬영으로 피사체의 힘을 완전히 소진시키는 <은판 위의 여인>의 사진 촬영술은 외형적으로 관절을 다루는 정형외과의 진료를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구로사와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환자의 몸을 치료하는 병원의 업무와 달리 피사체의 이미지를 프레임에 고착하는 사진과 영화는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의 체력과 의지를, 끝내는 생명마저도 앗아가는 과정이 된다. 마리의 죽음은 서사적 차원이 아니라 카메라를 비롯한 기계장치가 발산하는 역학적 차원에서 일찌감치 예견되는 것이다. 이미지를 눈앞에 나타나게 하기 위해선 고정된 장치에 피사체의 움직임을 한정하고, 가능하다면 멈춰 세우고, 심지어는 모든 범위의 자유를 약탈하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한다.

<은판 위의 여인>에서 구로사와 기요시는 장치에 속박된 인물의 신체적 증상을 통해 사진적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근원적인 구조를 드러낸다. 영화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조건을 전경화하는 이런 순간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세계를 영화적 이미지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요구되는 노동의 흔적을 되비추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객으로 별다른 불편 없이 눈앞에 떠오른 이미지를 바라보지만, 그것을 카메라로 담아내고 편집 과정을 거쳐 스크린에 투사하는 데는 일정한 노동의 과정이 수반된다. <애프터 양>에서 차를 끓이는 제이크의 손, <일 부코>에서 동굴 구조를 지도로 그리는 탐험가의 손, <은판 위의 여인>에서 카메라를 조작하고 피사체를 통제하는 스테판의 손에는 오랜 노동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중요한 것은, 영화적 노동의 과정은 현실에 놓인 대상을 착취하거나 훼손하고 이를 대체하는 이미지를 화면 내부에 도입하는 폭력적인 면모와 함께한다는 점이다. 결과물로서의 이미지를 보기 위해선 누군가의 죽음이 불가피하다(<애프터 양>의 안드로이드 양, <일 부코>의 양치기 노인, <은판 위의 여인>의 마리). 영화 이미지는 그 표면에 결부된 이중적 속성을 제거할 수 없다. 이미지에 매혹되는 것은 강탈된 대상의 흔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장치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영화 이미지

눈앞에 보이는 이미지와 더불어 그것을 산출하는 장치의 구조를 고려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모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게 된다. 흔히 알려졌다시피, 브레송이 추구한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럽고 유려한 표정과 동작, 풍부한 표현력, 목표와 의지를 명확하게 관철하는 행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반대로 브레송의 ‘모델’은 인물 내면의 감정적 표현을 차단하고, 의식적으로 계산된 표정과 동작을 허용하지 않는 독창적인 방법론으로 해석되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브레송이 주의 깊게 반복한 이미지는 그런 방법에 기초해 창조된 모델의 피사체를 고정된 장치에 묶어두는 장면들이다. 목줄에 묶인 당나귀 발타자르, 화형대에 묶인 잔 다르크,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를 몰고 가다 사고를 내는 <돈>의 이본,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레송의 인물들을 끊임없이 가두는 감옥이라는 장소. 브레송의 모델을 관측하는 것은 그 신체를 구성하는 독특한 원리에 주목하는 것만이 아니라 신체를 고정하고 속박하는 장치를 함께 말하는 것이어야 한다.

<당나귀 발타자르>는 발타자르의 이미지를 주시하면서, 동시에 한 마리 당나귀의 신체를 얽어매는 재갈과 고삐, 발굽과 목줄을 배치한다. <무셰트>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은 덫을 설치하는 사냥꾼을 보여준 뒤 함정에 포획된 새와 토끼의 발작적인 몸짓을 비춘다. 함정에 걸리는 것은 그러나 동물뿐만이 아니다. 기름에 미끄러지는 자동차가, 덫에 걸린 소녀의 죽음이, 우연히 찾아온 살인자의 범행이 브레송이 창안한 미장센의 무대에 가득하다. 그러니 브레송의 ‘모델’이 산출하는 독창적인 신호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기보다는 정상적으로 움직이려는 의지적인 몸과 인간 신체의 움직임을 한정하고 결박하는 세계의 공간적 구조 사이의 긴장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영화적 몸짓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브레송의 ‘모델’은 인간 신체가 독립적으로 발을 디디고 서는 형태의 불안정성을 전면에 비추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모델을 통제하는 세계의 구조가 사라진다면 그들은 <호수의 란슬로트>의 기사들처럼 금방이라도 목이 잘려나가고 말에서 추락해버리는 취약함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영화 이미지는 신체를 붙드는 장치들과 떨어져본 적이 없다. 특별히 인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영화가 비추는 ‘인물’은 결코 단독으로 존립하지 않는다. 널리 알려진 최초의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장의 문이 열리고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행렬을 포착하는 단편에서 영화적 사건을 출현케 하는 것은 그들의 신체를 경계 짓는 문과 열린 문으로부터 사람들을 태우고 나오는 자전거와 마차의 모습이다. 플랫폼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담은 짧은 기록에서도 핵심은 비슷하다. 사람들의 몸을 태우고 내리는 거대한 기차의 출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영화적 사건으로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연극 무대를 답습한 초기 영화들을 최초의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존 포드의 역마차, F. W. 무르나우의 노면 전차, 칼 드레이어의 관, 장 르누아르의 나룻배, 니컬러스 레이의 계단, 장뤼크 고다르의 자동차는 인물의 동선과 몸짓을 제한하는 장치를 틈입시켜 위대한 영화의 동작을 구획한 사례들이다.

F. W. 무르나우 감독의 <선라이즈>(1927)의 한 장면에서, 관계의 위기에 놓인 부부는 노면 전차를 타고 도시로 향한다. 아내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다. 그녀를 죽이려고 계획했던 남편은 뒤늦게 아내에게 사과와 위로를 건넨다. 그들의 뒤편으로 창밖 풍경이 천천히 스쳐 지나간다. 인간의 시간과 풍경의 시간이, 인물들의 서사와 이동하는 장치의 시각적 리듬이 결합하는 순간이다. 전차가 도시에 도착하고 아내는 망설임 끝에 밖으로 내린다. 차도로 나선 두 사람은 위협적으로 달려드는 자동차로 인해 서로의 몸을 끌어안는다. 물론 여기서 완벽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면 전차의 운행에 의존해 풍경과 도심을 지나치는 수동적 체험 속에서 기적 같은 화해의 전조가 마련된다. 위기 속에서 그들은 움직이는 장치에 신체를 맡겨 또 다른 삶의 기회를 형상화한다. 그들의 작은 몸짓과 그 몸짓의 범주를 한정 짓는 장치의 결합으로부터, 기적을 일으키는 영화적 회복의 순간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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